물론(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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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운영 과정에서 처리되는 정책이나 인사행정 등에 대한 사람들의 논의나 비평.

개설

물론(物論)은 물의(物議)와 같은 개념으로 통용되었다. 국정과 관련된 조정 관료들의 일반적인 여론을 의미한다. 조정 신료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므로 정당성을 갖고 있다거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고려해야만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물의는 불완전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주의를 요하거나 배제할 수도 있는 의견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물의가 당색(黨色)과 벌열(閥閱) 가문에 전유되어 인사행정을 그르치게 하는 기제로 전락하자, 물의는 뭇사람들의 사사로운 의견일 뿐이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 『조선왕조실록』에서 나타나는 물론 혹은 물의의 용례는 대체로 조정 관료들의 일반적인 여론을 의미하였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므로 정당하거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물의에 맞는 자를 택하다(『세종실록』 7년 2월 21일), 물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다(『세종실록』 11년 1월 13일), 물의가 어떨지 두렵다(『세종실록』 16년 12월 12일), 물의가 못마땅하게 여기다(『세종실록』 18년 4월 18일), 물의에 부응하지 못하다(『세종실록』 20년 11월 19일), 물의가 분분하다(『세종실록』 21년 윤2월 10일), 물의가 자자하다(『세종실록』 21년 6월 26일), 물의를 일으키다(『세종실록』 22년 7월 5일), 물의 역시 그렇게 여기고 있다(『세종실록』 24년 1월 16일), 물의가 두렵다(『세종실록』 25년 7월 25일), 물의에 맞지 못하다(『세종실록』 26년 12월 15일), 물의가 크게 놀라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10일), 물론에 부합하다(『세조실록』 4년 6월 29일), 물의에 신임을 받지 못하다(『성종실록』 9년 6월 19일), 물의가 반드시 그르다고 할 것이다(『성종실록』 14년 7월 27일), 물의에 논박당하는 것이 마땅하다(『성종실록』 24년 4월 19일), 조정(朝廷)의 물의를 두려워하다(『성종실록』 4년 7월 18일) 등과 같이 기본적으로는 조정 신료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는 일반적인 입장이자, 조정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신료 일반의 의견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왕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물의가 있을 것 같다.”(『세종실록』 1년 3월 23일), “어찌 물의가 없겠는가?”(『세종실록』 1년 11월 16일), 혹은 “물의가 칭찬하니 사양하지 말라.”(『성종실록』 15년 1월 8일) 등과 같이 물의를 조정 신료들의 여론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왕이 물론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물의가 마땅히 귀 기울여야 하는 신료들의 일반적인 입장이라는 의미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물의는 ‘어딘가 불완전함을 내포하고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주의를 요하거나 심지어는 배제해야 하는 의견’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만약 다시 밝게 분간하지 않으면 물의가 어떻게 그 허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세종실록』 10년 6월 14일) 하는 말은 물의 자체가 완전한 것은 아니고 사전에 분명한 시비분별이 있은 연후에야 온전해질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신의 이 말은 폐부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물의를 헤아리겠습니까.”(『세종실록』 24년 10월 23일) 하는 말 역시 비록 자신의 입장과 물의가 다를지라도 자신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진심을 전달하고 있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신 등은 물의를 널리 채택하여 일이 대체(大體)에 관계된 연후에야 그것을 말합니다.”(『성종실록』 25년 5월 6일) 하는 용례에서는 여러 물의들 가운데 대체와 관계된 선별된 물의를 언론의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무릇 대간이란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자기 몸을 곧게 행할 것인데 어찌 물의에 끌려서 억지로 남이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것을 따르겠습니까?”(『연산군일기』 2년 8월 10일) 하는 말에서는 대간의 언론은 대간 자체 내의 입장을 중시하는 것이지 물의를 그대로 좇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물의 자체가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로도 통용되고 있다.

왕의 물의에 대한 언급 가운데서도 물의가 불완전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태종은 대간들에게 “언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옳고 그름을 논하지 않고 물의를 좇은 것이 옳은가.”(『태종실록』 6년 5월 18일) 하여 대간이 단순히 물의만을 좇을 뿐 시비 분별을 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비난하였다. 또한 ‘한갓 외간(外間)의 물의를 가지고 이를 탄핵한다면 뒷날 폐단이 있을까 두렵다.’(『성종실록』 10년 5월 1일) 하는 성종의 말에서도 물의만을 좇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물의는 조정 신료들의 보편적인 입장이자 마땅히 참작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두려워하기까지 해야 하는 의견으로 통용되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완벽한 것은 아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물의와 다른 입장을 피력하거나 적절히 참작하며 선별해야 하는 의견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변천

조선후기에 이르러 조정에서 통용되고 있는 물의의 의미는 이전과 비슷하였다. 하지만 물의가 갖는 문제점, 특히 인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강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유수원은 『우서(迂書)』에서 물의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물의는 뭇사람의 사사로운 의견일 뿐이며, 가문 배경에 따라 관직 진출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물론을 중시하게 된 것은 관제(官制)가 허술하고 관리 임명에 법도가 없어서 인정(人情)이 신복(信服)하지 않아 자연히 물의가 생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수많은 관직 후보자 중에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가 자신들 마음대로 사람을 선발하여 결국 청탁이 난무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관리의 임명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어 물의가 일어난다고 지적하였다. 유수원의 이러한 비판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인사 문제가 특정 붕당이나 벌열 가문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물의가 잘못된 인사를 정당화시키는 기제로 오용되는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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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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