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文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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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구월산 남쪽 지역에 있으며 북쪽으로 장련, 동쪽으로 안악, 남쪽으로 신천, 서쪽으로 송화·은율에 접하는 곳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지방 행정구역.

개설

문화현(文化縣)은 황해도구월산 남쪽에 있던 읍이다. 고려시대에 문화현이 되었으며 조선시대 내내 읍격이 유지되었다. 1914년에 폐지되어 인접한 신천군에 합쳐져 문화면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궐구현(闕口縣)이었다. 고려 초에는 유주(儒州)라 불렸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풍주(豐州)에 속하였으나, 1106년(고려 예종 1)에 독립시켜 감무를 두었다. 1259년(고려 고종 46)에 위사공신(衛社功臣) 성균대사성유경(柳儆)의 내향(內鄕)이어서 문화현으로 바뀌었으며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고려시대의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1396년(태조 5)에 백령현(白翎縣)을 통합하였다(『태조실록』 5년 9월 28일).

조직 및 역할

음관직 종5품 현령이 다스렸으며,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아전 20명, 지인 10명, 사령 10명, 관노 4명, 관비 9명이 있었다. 군사는 시위군 15명, 진군 129명, 선군 181명이었으며, 구월산의 산성에는 별장 1명을 배치하였다.

변천

1396년에 백령현을 폐지하고 소속 주민들을 문화현에 이속시켰으나, 1427년(세종 9)에 강령진을 설치하면서 주민들을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세종실록』 9년 1월 19일).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1420년(중종 15)에 여역(癘疫) 즉 전염성 열병이 심하여 읍치의 위치를 북쪽으로 30리 정도 옮겼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재편할 때 해주부 문화군이 되었고,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시행되자 황해도 문화군이 되었다. 1914년에 폐지되어 신천군에 합쳐져 문화면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문화현(文化縣)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문화(文化)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석화,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한국문화』38, 2006.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한국문화』3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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