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문(文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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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의 전문.

개설

문정전(文政殿)은 조선초 창경궁의 공식적인 편전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문정전을 편전으로 사용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의 대부분 전각이 화재로 소실된 일이 있는데, 이때 인조는 창경궁에 머물렀고 문정전을 편전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것은 1623년(인조 1)부터 1624년(인조 2)까지에만 해당한다. 문정전은 대신 혼전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문정전은 많은 왕, 왕비, 대비의 혼전으로 사용하였고 혼궁으로 사용한 사례도 있다. 문정문(文政門)은 문정전의 전문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문정문이 등장하는 경우는 대부분 혼전 의식과 관련한 내용이다.

내용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은 동향이다. 명정전의 전문인 명정문(明政門)과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역시 동향이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다른 전각들은 남향이다. 문정전 역시 남향으로 만들어졌다. 창경궁 중건 당시 문정전을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남향으로 중건하였다(『광해군일기』 7년 11월 11일). 하지만 문정전의 전문인 문정문만은 동향으로 만들어졌다. 창경궁의 진입축과 편전의 진입축을 같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문정문을 통해 문정전 마당에 들어서면 방향을 바꿔 진입해야 문정전에 다다를 수 있다.

문정문은 3칸으로 만들어졌는데, 중앙의 어칸만 솟을대문으로 만들고 좌우 협문은 평대문으로 만들었다. 『궁궐지(宮闕誌)』에는 “문정문이 3칸이고 좌우행각이 모두 13칸 반이며 외복도가 4칸”이라고 했다. 또 문정문 밖에는 숭화문이 위치하였다. 숭화문 역시 문정문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어칸은 솟을대문이며 좌우 협문은 평대문 형식이다. 『궁궐지』에 따르면 “숭화문이 3칸이고 좌우 월랑이 모두 4칸이며 외복도가 5칸이었지만 외복도는 현재 없다.”고 했다. 문정문이 문정전의 전문이라면 숭화문은 문정전의 외문(外門)에 해당한다(『영조실록』 33년 11월 11일).

혼전으로 사용할 경우에 어칸은 신문이 되기 때문에 왕과 신하들의 출입은 협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1725년(영조 1)에는 문정전에 경종의 혼전인 경소전(敬昭殿)이 마련되었다. 당시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문정문을 통해 경소전에 출입한 기록이 있는데 문정문의 동협(東挾)을 통해 경소전에 들어갔고, 나올 때 역시 문정문의 동협을 통해 걸어 나왔다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문정문은 총 4차례 등장한다. 이중 3차례는 1645년(인조 23) 4월의 기록이다. 1645년(인조 23) 4월 26일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34세의 나이로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서 사망했다. 소현세자의 빈궁을 어디에 만들었는지 정확히 기록하지 않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으로 판단하건대 문정전을 빈궁으로 사용한 듯하다. 문정문은 염습(斂襲), 대렴(大斂), 성복(成服)의 의식을 지낼 때 시강원(侍講院), 익위사(翊衛司), 정원(政院), 옥당(玉堂) 등의 반차로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문정문이 등장하는 나머지 한 사례는 상장례와는 거리가 멀다. 1747년(영조 23)에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환갑을 맞아 가상존호(加上尊號)하는 의식을 창경궁에서 치렀다. 새로운 존호는 강성(康聖)이라고 했다. 가상존호 의식은 통명전(通明殿)과 명정전에서 치렀는데 의식을 마치면서 책함(冊函)과 보록(寶盝)을 문정문 밖에서 상전(尙傳)에게 건네준 다음 명정전 월대로 옮겼다는 내용이다(『영조실록』 23년 2월 19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
      1. 그림1_00017963_「동궐도」, 문정문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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