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성(文殊山城)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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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문수산성 |
한글표제 | 문수산성 |
한자표제 | 文殊山城 |
관련어 | 강화도(江華島), 병인양요(丙寅洋擾), 한성근(韓聖根), 염하(鹽河)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노영구 |
장소 | 경기도 김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문수산성(文殊山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년 9월 19일 |
조선후기 삼남에서 한강을 통하여 서울로 들어가는 수로를 통제하던 김포의 문수산에 수축된 산성.
개설
문수산성은 강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지역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17세기 후반 최초 축성이 이루어지고 19세기 초 개축이 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전투가 벌어져 남문과 그 일대 성곽이 파괴되었다.
위치 및 용도
문수산성은 김포반도 북단의 문수산 일대에 위치했던 산성으로, 강화도의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었다. 문수산성의 동북 방향에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흐르며, 서쪽으로는 강화와 김포 사이를 가로지르는 염하(鹽河)가 흐르고 있었다. 염하는 삼남 지역에서 서해를 따라 올라온 배가 서울로 들어가기 위하여 거치는 주요 뱃길로서, 문수산성은 이 염하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이며 강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군사·지리적으로 이 성은 강화도 및 주변 수로를 통제하고 방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성곽이었다.
변천 및 현황
문수산성은 강화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산 위에서 강화도 내부를 관측할 수 있었으므로, 고려후반 몽골의 침입 당시 몽골군은 이 산에 올라 강화도를 바라보고 염하를 건너려고 시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전기까지 강화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높지 않았으므로 문수산 지역에 대한 성곽 수축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 중반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가 왕의 피난지인 이른바 보장처(堡障處)로서 그 군사적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숙종 초반부터 강화와 육지의 연결 지역인 문수산 일대에 대한 축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675년(숙종 1) 영의정허적(許積)은 문수산에 적의 내침을 조기에 경보할 수 있는 성곽의 축조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1678년 병조판서김석주는 강화 방어를 위하여 문수산에 대한 축성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문수산성은 1693년(숙종 19) 10월 국왕 숙종의 결심으로 축성에 착수하여 이듬해 완성되었다. 이후 1812년(순조 12)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는데, 성벽은 장방형 혹은 정방형으로 다듬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으며 그 위에 여장을 설치하였다. 성문은 희우루(喜雨樓, 남문), 취예루(取豫樓, 동문), 공해루(控海樓, 서문) 등 3곳과 작은 성문인 3곳의 암문(暗門)이 있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의 전투로 해안 쪽의 성벽과 3곳의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다. 현재 북문과 남문은 복원이 완료되었고, 성벽은 산등성이를 연결한 지역은 잘 남아 있으나 나머지 지역은 많이 붕괴되고 부분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형태
문수산의 험한 줄기에서 해안지대를 연결한 형태의 문수산성은 최초 축조 당시 문수산을 둘러싸고 성곽이 축조되었고 둘레는 약 2.4㎞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 초 개축 당시 해안 지역까지 증축되면서 현재는 6㎞여에 달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문수산 정상에는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있으며 3곳의 성문과 3곳의 암문이 있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돌출 치성에 통하는 좁은 길인 이른바 용도(甬道) 3곳이 북동쪽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성벽은 자연 암반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전면은 석축이고 후면은 토축을 하였으며 장대는 부분적으로 벽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서문인 공해루를 나오면 곧바로 강화의 갑곶진과 연결되는 선착장으로 이어져 있어 당시 김포와 강화를 드나드는 통로로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66년 10월 병인양요 당시 문수산성에는 순무초관한성근(韓聖根)이 이끄는 조선군 50명이 배치되어 프랑스군의 내륙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대응 상황을 탐지하기 위하여 10월 26일 새벽 70여 명의 정찰대를 문수산성으로 파견하였다. 프랑스 정찰대의 보트가 20여m 전방 나루에 접안하려 하자 조선군은 일제히 기습 사격하여 5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이후 남문 일대를 중심으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이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퇴각하자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을 점령하고 남문 등 여러 시설과 민가를 소각하고 강화로 돌아왔다(『고종실록』 3년 9월 19일). 비록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프랑스군도 다소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강화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문수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참고문헌
- 『강도부지(江都府誌)』
- 서인한, 『병인·신미양요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9.
-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경기도 김포시 군사유적』, 1998.
-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한국사론』 34,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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