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계달(文繼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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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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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문계달 |
한글표제 | 문계달 |
한자표제 | 文繼達 |
분야 | 사회운동가/의사, 사회·신분/효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효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비승(丕承)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본관 | 남평(南平) |
주거지 |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병목리(竝木里) |
부 | 문임(文任) |
형제 | (동생)문홍달(文弘達) |
처_장인 | 조씨(曺氏): 조경덕(曺敬德)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문계달(文繼達) |
총론
생몰년 미상. 조선효종 때의 효자. 경상도 삼가(三嘉) 사람이다.
효종 시대 효자
문계달의 아버지 문임(文任)이 주인을 배반한 종의 소송을 맡아 다스렸을 때, 이들이 반심을 품고 무리를 지어 밤을 틈타 그의 집에 침입하였다. 문계달은 위기를 면했으나 문임은 그들에게 살해되었고 반노들은 모두 도망쳤다. 이에 문계달은 이들을 처벌하여 줄 것을 관찰사에게 호소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원수를 갚을 수가 없자 그 뒤 7년 동안 삼베옷을 입고 원수를 찾아 다녔다. 마침내 문계달은 강원도에서 그들 13명을 잡았으나 기운이 다하여 길에서 운명하였다.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653년(효종4) 8월 국왕의 전교(傳敎)로 그의 효행을 정려하도록 하였다. 아우 문홍달(文弘達)의 부탁으로 허목(許穆)이 1652년(효종3) 그의 전(傳)을 지었다.(『미수기언(眉叟記言)』 원집(原集) 권22 중편 「효자 문계달 비승의 장표(文繼達丕承葬標)」) 또한 문계달이 타고 다녔던 말이 그의 주인이 죽자 따라서 죽었기 때문에 그 말을 ‘의마(義馬)’라 하였는데, 그 말에 대한 찬을 성해응(成海應)이 지었다.(『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삼가읍지(三嘉邑誌)』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