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정사(戊寅定社)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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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무인정사 |
한글표제 | 무인정사 |
한자표제 | 戊寅定社 |
동의어 | 무인남정지란(戊寅南鄭之亂), 무인년사(戊寅年事), 무인지변(戊寅之變), 무인지사(戊寅之事) |
관련어 | 개국공신(開國功臣), 공요지의(攻遼之議), 사병혁파(私兵革罷), 세자책봉(世子冊封)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변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한춘순 |
발생시기 | 1398년(태조 7) |
발생장소 | 남은의 집 |
관련 인물/집단 | 인명 : 남은(南誾), 노석주(盧石柱), 문빈(文彬),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박위(朴葳), 변중량(卞仲良), 서익(徐益), 신극례(辛克禮), 심구령(沈龜齡), 심종(沈淙), 심효생(沈孝生), 이거이(李居易), 이근(李懃), 이무(李茂), 이방간(李芳幹), 이방석(李芳碩), 이방원(李芳遠), 이방의(李芳毅), 이백경(李伯卿), 이숙번(李叔蕃), 이제(李濟), 이직(李稷), 이화(李和), 장지화(張至和), 정도전(鄭道傳), 조영무(趙英茂)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무인정사(戊寅定社)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7년 8월 9일, 『태조실록』 7년 3월 20일, 『태조실록』 7년 8월 26일 |
1398년(태조 7)에 이방원 일파가, 종친·왕자 휘하의 사병 혁파를 주도한 정도전·남은 등을 제거한 사건.
개설
태조이성계의 5남 이방원(李芳遠)은 조선 왕조 개창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개국 후에 개국공신(開國功臣)에서 배제되었고, 세자 책봉에서도 밀려났다. 반면 정도전(鄭道傳)은 이성계의 8남이자 둘째 부인인 현비(賢妃)가 낳은 둘째 아들로서 세자에 책봉된 이방석(李芳碩)의 사부이자, 개국 1등 공신으로서 태조의 특대(特待)를 받으며 국정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1396년(태조 5) 이후 조선의 요동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명나라가 지속적으로 표문(表文)을 트집 잡는 것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정도전은 요동 정벌론을 제기하였다. 조준(趙浚)의 반대로 정벌론은 중지되었지만, 개국 초부터 시행된 군사들의 훈련은 계속되었다. 1398년 태조는 훈련 상태를 검열하였는데 나주진 이외의 모든 진에서 태만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잦은 병환으로 인해 정국 안정을 염려하던 태조는 정도전·남은(南誾)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종친·재상 휘하의 사병을 혁파하도록 하였다. 사병이 혁파된 지 며칠 후에 위기의식을 느낀 이방원 일파가 정도전·남은 등을 급습하여 제거하였다.
역사적 배경
1388년(우왕 14)에 추진된 요동 정벌에 반대한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적 실력자로서 우왕(禑王)·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기에 이르렀다. 1390년(고려 공양왕 2) 명나라에 있던 고려 사람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는 공양왕과 함께 이성계가 명나라를 범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하였다. 결국 무고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이 일로 이성계는 수시중(守侍中)에서 물러났다. 공양왕은 정몽주를 그 직에 제수하여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였다.
1392년 해주에서 이성계가 낙마하자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인 정도전 등을 유배시켰다. 이때부터 이방원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정몽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성과가 없자 정몽주를 제거하였다. 또한 공양왕에게 조준·남은 등을 소환하도록 하여 이성계 일파가 승기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일을 선두에서 지휘한 사람도 이방원이었다.
조선이 개국되었지만, 이방원은 개국공신 임명과 세자 책봉에서 밀려났다. 또한 태조에게 특별히 하사 받은 동북면 가별치[加別赤]까지도 태조의 7남이자 현비의 1남인 이방번(李芳蕃)에게 양보해야 했다. 가별치란 귀화한 여진의 대소 추장이 조선의 군민(軍民)으로 편입하는 것을 막고, 그대로 자기 휘하에 두고서 부리던 관하백성(管下百姓) 5백 호를 말한다. 현비가 개국 1등 공신인 인척 정희계(鄭熙啓)를 내세워 개국 초 태조에게 특별히 우대 받는 이방원을 철저하게 권력에서 소외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방원은 명나라와 사이에서 발생한 외교 문제의 해결사 역할을 잘 수행한 바 있었다.
발단
조선의 요동 공격을 두려워한 명나라는 개국 초부터 군제 개혁을 주도하는 정도전을 압송하기 위해 1396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실제로 표문을 지은 사람은 정도전이 아니었지만 명나라는 정도전을 명으로 끌고 오라고 요구했다.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자 계속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정도전과 남은은 요동 공격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현실 여건을 거론한 조준의 강력한 반대로 중단되었다.
요동 공격론이 중단되었지만 진도(陳圖) 훈련이 계속되자 그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였다. 훈련은 국초부터 계속되어 왔고, 강도도 높았다. 태조는 1398년 무렵 잦은 병환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정국 안정을 염려하고 있었다.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잘 훈련된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래서 훈련의 숙련도를 검열하니 제대로 습득한 것은 나주진 뿐이었다. 분노한 태조는 군사 훈련에 태만했던 공신·종친·장군 등 지휘관 292명을 처벌하였다(『태조실록』 7년 8월 9일). 며칠 후 이방번을 제외한 여러 왕자의 시위패(侍衛牌)가 혁파되었다. 사병이 혁파된 것이다. 정도전은 이 중대한 사안을 지휘·총괄하였다.
경과
사병을 혁파 당한 이방원 등의 위기감은 극심하였다. 태조가 단행한 조치지만, 사병 혁파는 정도전의 권력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1398년 3월 남은이 사병 혁파에 대해 언급한 것을 들었다(『태조실록』 7년 3월 20일). 그 후 그에 대한 대책을 하륜(河崙)에게 물었고, 선수(先手)를 써서 정도전을 없애라는 하륜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하륜을 중심으로 하여 무리를 결속하고 태조의 병환이 위중할 때를 거사 시기로 잡았다.
태조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방원은 다른 왕자·종친들과는 달리 상황을 판단한 끝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날 정도전 일파가 자신들을 제거하려 해서 어쩔 수 없이 먼저 나서게 되었다는 이방원의 해명과는 달리, 정도전 등은 그들의 계획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남은 집에 모여 있다가 일거에 제거되었다(『태조실록』 7년 8월 26일).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후 이방원은 태조의 2남인 이방과(李芳果)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사(定社) 1등 공신으로 책훈되고, 태조의 3남과 4남인 이방의(李芳毅)·이방간(李芳幹)과 함께 개국 1등 공신에 추록되었다. 또한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 겸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로서 사실상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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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주희, 「태종의 집권 과정과 정치 세력의 추이」, 『중앙사론』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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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