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정사(武夷精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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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무이정사 |
한글표제 | 무이정사 |
한자표제 | 武夷精舍 |
관련어 | 무이구곡도시(武夷九曲櫂詩), 운곡(雲谷), 후무이(後武夷) |
분야 | 교육·출판/교육기관/서원 |
유형 | 건축 |
지역 | 중국, 대한민국 |
시대 | 송, 조선 |
집필자 | 조준호 |
장소 | 중국 복건성 무이산 인근 |
관련 인물 | 주희(朱熹)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무이정사(武夷精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32년 5월 1일, 『중종실록』 37년 7월 27일 |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가 학문 연마를 위해 지은 정사(精舍).
개설
무이정사는 주자가 자신의 은거처인 무이산 인근에 지은 건물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이곳을 주자학의 학문적 발원처로 인식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주자의 학문적 도량이었던 무이정사·한천정사(寒泉精舍)·죽림정사(竹林精舍)의 이름을 서재(書齋)와 서원(書院)의 이름에 인용하며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으려 하였다.
위치 및 용도
무이정사는 주자가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무이산 인근(현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지은 은거처이다. 주자는 1183년(남송 순희 10) 나이 54세에 무이산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10여 년간을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주자는 『소학(小學)』과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짓고 따르는 문인들을 지도하며 자신의 학설을 전파하였다. 이때에 주자는 학문에 대한 자신의 심경과 생활 자세를 담아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찬하기도 하였다. 주자의 학문 도장(道場)으로는 무이정사와 함께 41세에 세운 운곡(雲谷)의 한천정사, 65세에 세운 고정(考亭)의 죽림정사가 있다.
변천 및 현황
16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주자 성리학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하였다. 이와 함께 주자학의 발원처이자 본산으로 인식된 무이산을 배경으로 한 무이구곡과 주자가 건립한 무이정사 등에 대한 관심도 촉발되었다. 주자학에 심취하였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무이산은 학자의 이상향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서적을 통해 무이정사가 그려진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접했고, 주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를 널리 유통시켰으며, 주자에 대한 절실한 존숭의 태도를 담아 여러 편의 찬시를 남겼다.
주자학 관련 서적이 본격적으로 전래되는 중종 연간부터 연대기 자료에 나타나는 무이정사와 무이구곡에 대한 자료는 이러한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1537년(중종 32) 중국 사신이 주자의 「무이구곡도시(武夷九曲櫂詩)」 20장을 전해 주자, 왕은 병풍으로 제작하라 명하였다(『중종실록』 32년 5월 1일). 1542년(중종 37)에는 행부사과(行副司果)의 어득강(魚得江)이 피폐한 관학 교육을 진흥할 방책을 진언하는 상소에서 중국의 저명한 학자와 서원에서의 강학을 소개하였다. 이때 주희(朱熹)가 무이정사를 지어 학도를 기르고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설립하여 널리 유풍을 진작시킨 사례를 거론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7년 7월 27일).
무이정사에 대한 조선 학자의 높은 관심도는 여러 사례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조선 주자학을 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이황(李滉)은 「무이구곡도」를 접하고 존숭의 마음을 담은 글을 남겼고, 더 나아가 주자가 건립한 서원의 체제를 받아들여 조선 서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황의 문인 정구(鄭逑)도 이러한 인식선상에서 무흘구곡(武屹九曲)이라는 은거 공간을 실현시켰다.
이후 서인-노론계 학자들은 주자학의 이상향을 구현하려는 시도에 적극적이었다. 이이(李珥)에 의해 명명된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계승하여 송시열(宋時烈)의 화양구곡(華陽九曲), 김수증(金壽增)의 곡운구곡(谷雲九曲) 등이 유명하다. 더 나아가 18세기 이후 주자-송시열로 계승되는 도통관(道統觀)을 정립시켜 나갔던 노론계는 주자의 학문과 송시열의 학문을 동일시하는 일환으로 주자학의 발원처를 조선에 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송시열은 만년에 충청도청주 화양동에 화양구곡을 조성하였다. 이후 그가 죽자 문인들은 1696년(숙종 22) 이곳에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을 건립하고 조정에 사액을 요청하였다. 당시 노론은 송시열의 화양동이 주자의 무이와 같으므로 제향하는 원우(院宇)를 건립하였다며 사액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숙종실록』 22년 9월 6일]. 이후 조선에서는 주자가 살던 곳과 지명이 비슷하다 하여 서원의 건립을 요청하는 일이 잇달았다. 경기도 연천에 주자를 제향하는 임장서원(臨漳書院)의 사액 상소 등에서 그 사례를 살필 수 있다[『숙종실록』 37년 9월 20일].
참고문헌
- 윤진영, 「조선시대 구곡도(九曲圖)의 수용과 전개」,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217~218, 1998.
- 윤진영, 「한강 정구의 유거 공간과 『무흘구곡도(武屹九曲圖)』」, 『정신문화연구』33, 2010.
- 정만조, 「조선 학자 정구가 증손한 양항숙 편 『무이지(武夷志)』의 분석」, 『무이산 국제학술회의발표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