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보(撫夷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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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경흥도호부에 소속된 만호진.

개설

무이보는 관방시설로 성종대에는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하지만 성종대 말기에는 북방 야인의 무이보 침략이 점점 증가하였으며, 선조대 말기에는 누르하치 세력도 무이보를 위협하고 있었다. 무이보는 경흥부가 피해를 입으면 경흥부가 옮겨 올 만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위치 및 용도

무이보는 경흥도호부의 북쪽 26리(약 10㎞)에 위치해 있다. 무이보는 진이 강 가까이에 닿아 있고, 주변은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무이보의 지형상 단점은 진의 뒤에 있는 주봉이 너무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동남쪽으로 35리(약 13.7㎞)를 가면 경흥진에 도달한다. 『여지도서』에는 관아의 북쪽 30리(약 11.8㎞)에 무이보가 있다고 하였다. 남쪽으로는 아오지보(阿吾地堡)와 30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아산보(阿山堡)와 55리(약 21.6㎞) 떨어져 있다. 무이보는 현재 경흥군 경흥면에 속한다.

변천 및 현황

무이 지역에 처음 보가 설치된 때는 1441년(세종 23) 1월 29일로, 당시 무이는 경원에 속해 있었다(『세종실록』 23년 1월 29일). 경흥부에 속하게 된 것은 1444년(세종 26)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세종실록』 26년 10월 15일).

무이보는 경흥도호부에 속한 만호진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만호가 거느리는 군사는 65명이었다[『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경흥도호부]. 『제승방략』에 따르면 토병이 62명이고, 남쪽 지방에서 부방(赴防)하는 군사가 25명이었다. 병마만호 1명을 두었다.

1454년(단종 2) 1월 무이보에서 화재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의 화재로 인해 공사(公私)의 관청과 가옥이 거의 타버렸다. 조정에서는 함길도관찰사로 하여금 경흥 부근의 여러 읍에 거주하는 백성을 부려 2월까지 고쳐 짓도록 명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18일). 1472년(성종 3) 7월 기사에는 성종이 무이보에 성을 쌓는 일을 병조에 명한 사실 및 잠시 그 일을 정지한다는 논의가 보인다(『성종실록』 3년 7월 8일).

무이보 등 북방의 사정은 1491년(성종 22)에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1월 12일에 올적합(兀狄哈)이 무이보 인근의 조산보(造山堡)를 공격하여 군사들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한 것이다(『성종실록』 22년 1월 19일). 이때 무이보를 지키고 있던 우후(虞候)최진하(崔進河)는 그 일로 국문을 받았다(『성종실록』 22년 2월 6일). 최진하의 죄목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머뭇거리고 조산보로 진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국문 결과 성종은 최진하의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직첩을 회수하고 변방 먼 곳으로 보내어 충군(充軍)하도록 했다(『성종실록』 22년 2월 25일).

올적합은 조산보뿐만 아니라 무이보까지도 침략을 계획했다. 영안북도절도사 윤말손(尹末孫)의 보고에 따르면 1491년 1월 22일 무이보 강 밖의 시전(時錢) 등지에서 불꽃이 하늘을 밝힐 정도로 환하게 9~11시경까지 꺼지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 날 보고된 바는 올적합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윤말손 등은 군영에 소속된 군사 600명을 통솔하여 육진(六鎭) 지역을 순행하면서 변란에 대처하고 있다고 하였다(『성종실록』 22년 2월 3일).

1493년(성종 24) 4월에는 특진관(特進官) 여자신(呂自新)이 영안도(현 함경도)의 백성이 겨울철에 거진에 입보(入保)하는 것을 힘들어하므로 그대로 소농보(小農堡)에 살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성종에게 보고했다. 당시 무이보에 속한 백성은 아오지에 입보하였는데, 사람은 많고 집은 적어서 흙집을 만들어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여자신은 무이보의 낮고 작은 곳에 성자를 더 쌓아서 백성이 그대로 머물면서 방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동시에 그는 조산보를 동쪽으로 옮기고 경흥을 중앙으로 옮긴다면 각 영진 간의 거리도 10리라서 방어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성종실록』 24년 4월 13일). 이에 성종은 여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영안도관찰사 성준(成俊)과 북도절도사 변종인(卞宗仁)에게 명을 내렸다(『성종실록』 24년 4월 14일).

한편, 1507년(중종 2) 8월에는 함경도관찰사고형산이 무이보에 창고 설치를 건의하였다. 그동안 무이보는 경흥부와 너무 멀어서 곡식을 거둬들이거나 전세(田稅)를 받을 때 도적맞을 위협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밤을 새워 이동했는데, 이것이 무이보 백성에게 큰 불편을 초래한 것이다(『중종실록』 2년 8월 1일).

다음 해인 1508년(중종 3)에는 무이보의 진무박유창(朴有昌)이 야인(野人)을 침학한 일을 계기로, 야인이 무이보를 침략하는 일이 발생하였다(『중종실록』 3년 2월 26일). 이에 함경도관찰사는 무이보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을 송환하기 위해 남눌(南訥)·올적합 등 여섯 명을 경흥부에 구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중종실록』 3년 4월 25일). 결국 1509년(중종 4) 1월에는 무이보 군사 최수강(崔守江) 등이 송환되었으며, 조선 측에서도 남눌(南訥)·우지개(于知介)·이시라(伊時羅) 등의 처자(妻子)를 돌려보내 주었다(『중종실록』 4년 1월 25일).

1539년(중종 34) 9월, 양연(梁淵)은 무이보에 대해 이곳은 방어가 가장 긴요한 곳인데 방어책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군민이 가장 쇠잔한 경흥 지역은 토질이 습해서 기름지지 못하고 또 쉽게 가뭄이 드는 데다가 일찍 서리가 내리기 때문에, 여기 사는 많은 백성이 살아나갈 도리가 없다고 했다. 특히 이 지역에는 남쪽 지방에서 옮겨온 이들이 많아서 도망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러자 양연은 토병을 입거시킬 것을 주장하였다(『중종실록』 24년 9월 21일). 무이보는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였지만, 토지가 척박하고 수확량도 장담할 수 없어서 도망자가 속출했다.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했던 성세창(成世昌)도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중종 역시 별다른 방책을 내놓지는 못했다(『중종실록』 35년 4월 5일).

두만강에 인접한 무이보는 침수 피해를 입기도 했다. 1550년(명종 5) 윤6월 17일부터 19일까지 내린 비가 무산에 연접한 전지를 모두 침수시켜버렸다. 이로 인해 농작물의 수확은 기대할 것이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창고에 있는 곡식으로 피해를 입은 백성을 진휼하도록 했다(『명종실록』 5년 8월 2일). 1563년(명종 18) 7월에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서 무이의 평지밭이 침수되기도 했다(『명종실록』 18년 9월 8일).

무이보는 적로(賊路)에 있어 항상 오랑캐의 침입 위협이 있었다. 실제로 1607년(선조 40) 3월에는 노추(老酋), 즉 누르하치 세력이 무이·경원·미전·안원 등에 건너와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약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당시 여오리(汝吾里)에 살고 있는 오랑캐 남녀 30여 명이 적에게 잡혀갔다고 보고되었다(『선조실록』 40년 3월 22일)(『선조실록』 40년 3월 23일).

한편, 경흥부의 위치를 옮기자는 논의가 있을 때 무이보가 그 대상지로 거론되기도 했다.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1833년(순조 33) 경흥부를 아오지와 무이보 중에 한 곳으로 옮길 것을 논의한 바 있으며, 이때에 후보지로 선정된 곳이 바로 무의보였다. 1834년(순조 34) 1월 10일에는 경흥부의 소재지를 무이진과 바꾸어 설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순조실록』 34년 1월 10일). 하지만 무이진으로 옮겨온 경흥부는 또다시 홍수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1846년(헌종 12)에 다시 본래의 경흥부 위치로 회복되었다(『철종실록』 10년 8월 28일).

그러던 것이 1870년(고종 7) 12월 의정부에서는 함경감사김수현(金壽鉉)의 장계를 전달하면서 경흥부와 무이보의 위치를 바꿀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고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당시 경흥부가 재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도읍의 백성들이 모두 옮길 것을 하소연하였다. 이에 경흥부는 다음 해에 무이보로 옮기게 되었고, 현재의 경흥부 터는 무이보만호가 와서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고종실록』 7년 12월 9일). 그리고 1889년(고종 26) 12월 16일 무이보만호는 혁파되기에 이른다(『고종실록』 26년 12월 16일).

형태

성은 돌로 쌓았다. 둘레는 3,900척(약 1.2㎞)이고, 옹성(甕城)이 2곳이며, 곡성(曲城)이 9곳이고, 여장(女墻)은 72곳이다. 문은 동문과 북문만 있었다. 천정(泉井)은 7곳이었다. 『대동지지』에는 성안에 우물이 2개 있다고 하였다. 『여지도서』에는 성의 둘레가 3,240척(약 982m)이고 높이는 9척(약 2.7m)이라 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여지도서(輿地圖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북정일록(北征日錄)』
  • 『대동지지(大東地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