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전(武英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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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경 자금성 안에 있는 전각.

개설

명나라 때에는 황제가 정무를 보거나 대신들을 접견하던 장소였다. 청나라 건륭 연간(1736~1795년)에는 이곳에서 목활자(木活字)로 인쇄된 서적이 간행되었다.

위치 및 용도

무영전은 뒤편에 경사전(敬思殿), 동쪽 곁채는 응도전(凝道殿), 서쪽 곁채는 환장전(煥章殿)이 있었다. 서쪽에는 1680년에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편찬하기 위하여 설립한 수서처(修書處) 욕덕당(浴德堂)이 있으며, 서쪽에 정정(井亭)이 있고 동북쪽에는 건륭 연간에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교열하던 신하들의 당직방인 항수재(恒壽齋)가 있었다.

변천 및 현황

명나라 초기에는 황제가 무영전에서 재계(齋戒)를 하고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이후 동쪽에 위치한 문화전(文華殿)이 태후가 거처하는 궁전과 비교적 가까운 까닭에 역대 황제들 대부분이 문화전에서 재계를 하게 되므로, 무영전은 점차 황제가 발길이 끊기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에서는 대학사(大學士)를 설치하였으며, 무영전에 시조(侍詔)를 설치하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자를 선발하여 거처하게 하였다.

무영전은 1644년에 자금성을 점령한 이자성(李自成)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였다. 1644년 6월 6일 청나라 순치제(順治帝)를 대신한 섭정왕 도르곤([多爾袞], dorgon)이 조양문(朝陽門)을 거쳐 입경한 이후 무영전에서 정무를 보았다. 청 군대가 북경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황극전(皇極殿)·문연각(文淵閣) 등의 건물이 모두 불타 버린 반면, 무영전만 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인조실록』 22년 8월 23일).

1680년에 무영전에 수서처를 설립하여 후에 조변처(造辯處)로 개칭하고 사림, 한원 등의 신하들을 선발하여 서적을 교열하기 시작하였다. 강희 중기에는 구리로 글자를 조각하여 활자판으로 서적을 조판·인쇄하였다. 1772년에는 건륭제가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위하여 무영전에 ‘사고전서관’을 설립하여, 10년 만에 완수하였다.

1869년 화재로 인하여 무영전 일대가 불타면서 전각과 소장하고 있던 전판이 소실되었다. 건물은 같은 해에 중건되었으나, 잔존한 전판은 현재 대만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자금성의 수리가 이루어진 2005년 이후에는 서화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형태

무영전은 동쪽에 있는 문화전과 짝을 이루는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64년 도르곤이 북경 자금성에 들어갔을 때, 도르곤은 무영전 앞 행랑채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처소를 정하여 거처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곳은 공간이 비좁고 사람이 많자, 소현세자는 도르곤에게 말하여 무영전의 조금 더 넓고 침상·탁자·병기·의장 등이 있는 동쪽 방을 얻게 되었다(『인조실록』 22년 5월 23일).

참고문헌

  • 鄭志海·屈志靜, 『북경자금성』, 금일중국출판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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