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사(武烈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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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극복에 큰 공을 세운 명나라 병부상서석성과 제독이여송 등을 기리기 위해 이원익이 평양에 건립한 사당.

개설

1593년, 임진왜란의 분기점이 된 평양성 전투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였던 석성(石星)이 조선에 원군을 적극 파병할 것을 주장했고, 그 결과 파견된 제독이여송(李如松) 등이 이끈 군대가 승리를 거둠으로서 탈환에 성공하였다. 조선은 이를 기리기 위해 평양에 무열사(武烈祠)를 건립하였다. 건립 초에는 석성, 이여송 외에 좌협장(左協將)양원(楊元), 중협장(中協將)이여백(李如栢), 우협장(右協將)장세작(張世爵)까지 다섯 명을 모셨다가 정조대에 총병(摠兵)낙상지(駱尙志)가 추가로 배향되었다.

위치 및 용도

무열사는 평양부(平壤府) 서문(西門) 안에 있는데, 명나라 병부상서석성, 제독이여송, 좌협장양원, 중협장이여백, 우협장장세작, 총병낙상지를 제사한다.

변천 및 현황

임진왜란 발발 후 일방적인 패배로 국왕의 요동 귀부까지 추진했던 조선은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군의 도움으로 평양성을 되찾으면서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들이 보인 명나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국망의 위기를 벗어난 근본적인 이유를 명나라군의 참전에 두게 되면 원군 요청의 주체인 선조의 공을 드높일 수 있었다. 이는 전란 초기 국왕이 보였던 무책임한 자세를 상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군의 공적을 높이는 일은 조선의 국왕인 선조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일과도 직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열사는 바로 이런 정치적 목적 하에서 평양성이 탈환된 이후인 1593년(선조 26)에 체찰사(體察使)이원익이 건립하였다. 원군 파병을 강하게 주장한 명나라 병부상서석성과 평양성 탈환에 공이 많은 제독이여송, 좌협장양원, 중협장이여백, 우협장장세작을 배향하였다. 다만 건립된 이후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정례적인 제사가 이루어지지는 못한 것으로 이해되는데(『선조실록』 37년 7월 20일), 1709년(숙종 35)에 이르러야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 국가적인 차원의 관리가 정례화된 것으로 보인다(『숙종실록』 35년 9월 11일).

한편 명나라가 멸망하고 조선 스스로를 중화의 계승자로 여기는 인식이 강화되면서 조선 정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명나라의 후예들을 관리하고 보살피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맥락에서 석성의 후손을 찾거나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명나라 장수들을 재발굴하기도 하였다. 등자룡(鄧子龍)이 강진의 탄보묘(誕報廟)에 추가로 배향된 것이나 낙상지가 무열사에 배향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정조실록』 16년 8월 19일). 이렇게 됨으로써 정조대에 와서 무열사에는 총 6명이 배향되었는데 1908년(순종 2)에 와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든 절차가 폐지되었다(『순종실록』 2년 7월 23일).

형태

1593년에 건립되었을 때에는 배향한 다섯 사람인 명나라 병부상서석성, 제독이여송, 좌협장양원, 중협장이여백, 우협장장세작의 화상(畵像)을 걸었다. 그 후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석성의 화상만 그대로 남고 이여백의 화상은 허리 윗부분만 남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유실을 당했으므로 위판(位版)으로 대신하였다(『인조실록』 12년 2월 19일). 정당(正堂) 남쪽 기둥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지은 시인 ‘의담충간기작산하웅만리(義膽忠肝氣作山河雄萬里), 위용덕범사심검리전삼한(威容德範思深劍履奠三韓)’이 쓰였고 문미(門楣)에는 ‘장유완절(壯猷完節)’이라 하였다.

관련 사건 및 일화

이여백의 아우 이여매(李如梅)는 1619년(광해군 11) 심하(深河)의 싸움 때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증손자인 이동배(李東培)가 1711년(숙종 37) 사은(謝恩) 행차 때 참판민성유(閔聖猷)를 따라 북경에 왔다가, 이여매의 형인 이여정(李如楨)의 증손 이정재(李廷宰)와 이정기(李廷基)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정재는 이여백의 화상이 평양 무열사에 있다는 말을 듣고, 모사해서 보내줄 것을 청했다. 이로 인해 민성유는 무열사에 있는 이여백의 화상을 김진여(金振汝)에게 모사하도록 하였고 이것을 김창업(金昌業)이 참여한 연행 사절에 부쳐서 1713년(숙종 39) 1월 이정재에게 전해 주었던 일이 있다.

평안도관찰사홍양호(洪良浩)는 1791년(정조 15) 4월 부임 직후에 무열사를 방문해서는 석성과 이여백의 화상 및 이여송, 양원, 장세작의 신주를 목도하였다. 그런데 가서 보니 사당 자체가 좁고 누추하여 몇 개의 기둥만 서 있었고 수직소(守直所)도 없이 몇 사람의 유생이 지키며 한 달에 두 번씩 분향만 할 뿐이었다. 이런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두 양재(兩齋)에 유생과 무사를 뽑아서 번갈아 관리하게 하면서 공부하는 장소를 삼았고 밖의 터를 넓히며 대문을 세워 체모를 높였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1792년(정조 16) 8월에 평안도관찰사홍양호가 정조에게 상소하는 동시에 낙상지의 추가 배향을 건의하였고 결국 이 건의에 따라 정조는 낙상지의 배향을 명하였다(『정조실록』 16년 8월 6일).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 허태용, 『조선후기 중화론과 역사인식』, 아카넷, 2009.
  • 한명기, 「임진왜란 시기 再造之恩의 형성과 그 의미」, 『동양학』29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9.
  • 한종수, 「조선후기 숙종대 관왕묘 치제의 성격」, 『역사민속학』21 , 한국역사민속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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