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현(務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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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무안군과 목포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본래 백제의 물아혜군(勿阿兮郡)이던 것을 신라 때 무안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혜종 때 물량군(勿良郡)이라 고쳤다가 991년(고려 성종 10)에 도로 지금 이름으로 부르면서 나주목에 소속시켰다. 1172년(고려 명종 2)에는 무안에 감무를 두었다.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무안감무가 성산극포권농방어사(城山極浦勸農防禦使)를 겸임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7년(태조 6)에는 전라도 4진 가운데 하나를 목포에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두었다. 1408년(태종 8)에 전라도 수영을 옥구에서 무안으로 옮겨 왔는데, 1433년(세종 15)에는 그것이 다시 해남 황원으로 옮겨 갔다. 1455년(세조 1)에 무안현이 전라도 무장진(茂長鎭)의 좌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무안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나주진에 속했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해안 방어의 강화 차원에서 무안현에 포군(砲軍) 22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무안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91년에 무안군으로 하고 이를 나주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1172년에는 무안에 감무를 두었으며, 1391년에는 무안감무가 성산극포권농방어사를 겸임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1397년에는 전라도 4진 가운데 하나를 무안현에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두었다(『태조실록』 6년 5월 21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무안현이 관할해 오던 1소 즉 수다(水多)가 폐지되어 무안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대동지지』에 따르면 1413년(태종 13)에 무안에 현감이 파견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안현에 종6품 현감(縣監)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세종실록』 15년 2월 25일). 무안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이때 무안은 하긴(下緊)으로 분류되어 비록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오르지 못하였을지라도 이재(吏才)와 지략을 겸비한 자를 가려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이것은 연변 지역 방어의 중요성을 고려한 조치였다.

변천

1397년에 흥덕을 비롯하여 옥구·목포·조양에 4개 진(鎭)을 설치하고 각 진에 첨절제사를 두었다(『태조실록』 6년 5월 21일). 그런데 이때의 목포는 지금의 목포가 아닌 무안현이 관할하던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였다. 1408년에 전라도 수영을 옥구에서 무안으로 옮겼다. 그에 앞서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옥구현에 설치되었던 수영을 무안현의 대굴포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 옥구 수영이 해로의 중앙이 아니므로 해로의 중앙에 위치한 무안으로 옮기는 것이 왜적을 막기에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었다(『태종실록』 8년 12월 24일). 1432년(세종 14)에 이것을 현재의 목포로 옮겼으며(『세종실록』 14년 10월 20일), 1433년(세종 15)에는 다시 해남 황원으로 옮겼다. 1440년(세종 22)에 정식으로 황원에 전라 수영의 본영을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1479년(성종 10)에는 전라도 서남 해안의 방어 지역이 너무 넓어 순천부 내례포(內禮浦: 현 여수시 국동)에 또 하나의 수영을 두었다. 그때부터 전라도 수군 절도사영이 우수영과 좌수영으로 분리되었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무안현을 전라도 무장진의 좌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무안현이 나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나주거진이 전라우영(全羅右營)으로 바뀌었다. 우영(右營)의 속읍은 나주·광주·능주·영암·영광·화순·남평·무안·함평·무장 10곳이며, 우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52초, 표하군(標下軍) 210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65명으로 되어 있다.

1871년에 삼군부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무안현에 포군 22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무안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무안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목포시사』, 목포시사편찬위원회, 1997.
  • 『무안군사』, 무안군사편찬위원회, 1994.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