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학교(武官學校)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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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무관학교 |
한글표제 | 무관학교 |
한자표제 | 武官學校 |
동의어 | 사관학교(士官學校) |
관련어 | 갑오개혁(甲午改革), 교관단(敎官團), 무관학도모집령(武官學徒募集令),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 아관파천(俄館播遷), 장교(將校), 진위대(鎭衛隊), 친위대(親衛隊) |
분야 | 교육·출판/교육기관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 |
왕대 | 고종 |
집필자 | 정욱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무관학교(武官學校)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5년 5월 14일 |
갑오개혁의 과정에서 근대식 군대를 양성하는 방안으로 장교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사관학교.
개설
1896년(고종 33) 1월 11일에 훈련대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폐지하고 무관학교관제(武官學校官制)를 제정하였다. 이로써 본격적인 사관학교인 무관학교(武官學校)가 설립되었다. 또한 1월 15일에는 무관학도모집령(武官學徒募集令)을 반포하고 20~30세 미만의 지원자를 모집하여 본격적인 생도 양성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을 단행하였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암살자들 속에 한국인과 다수의 군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신변의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종은 기존에 일본인들이 양성한 시위대가 친일적인 것은 물론 자신의 명령조차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군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중앙군과 지방군을 개편하는 동시에 러시아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근대적인 훈련을 실시하였다. 1896년(고종 33) 3월 4일 수도방위를 담당한 친위대는 기존의 3개 대대에서 5개 대대로 증설되었으며, 4월 22일에는 대대 편제 자체는 유지하되 제1~3대대를 제1연대로 편성하고 나머지 제4~5 대대는 독립 대대로 존치시켰다.
동시에 1896년에 설치하였던 일본식 무관학교를 폐쇄하고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여 러시아식으로 양성하고자 했다. 특히 1896년 3월 10일 러시아 니콜라이 황제의 대관식 특사로 파견된 민영환(閔泳煥)은 러시아 정부에게 조선 군대 및 경찰의 훈련을 담당할 200명 규모의 군사교관을 파견해 줄 것과 새로 군대가 창설될 때까지 800명의 러시아 군인이 고종의 호위를 담당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군대의 파견은 거절하고 군사교관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896년 10월 21일에 민영환 일행과 러시아 교관인 푸티아타 대령 등 14명의 러시아 군인이 한양에 도착하였다. 러시아 교관단은 친위대에서 800명을 선발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선발된 친위대 군사들은 5개 중대로 나뉘어 훈련을 받았고, 유럽식 소총으로 사격술을 익혔다. 러시아 교관단의 노력에 따라 1897년(광무 1) 2월 8일에는 친위대가 1,070명으로 증원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경운궁에 환궁하는 것에 대처할 수 있었다.
1898년(광무 2) 3월 러시아 교관단이 철수한 뒤 4월에 군부대신 이종건이 무관학교 설립을 청의하여 재가받았고, 6월에는 육해군 친총(陸海軍 親摠)에 관한 조칙을 내려 고종이 대원수로서 직접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는 황제 중심의 원수부 편제를 구축하였다. 또한 군제 개혁을 주도하고 논의할 기구를 설치하였다. 1899년(광무 3) 1월부터 군부의 부장과 참장을 거친 사람들이 매월 세 차례 모여 군무와 군제 개혁의 방향을 논의하였다. 2월의 군부회의에서는 정지하였던 무관학도를 현재 설치한 학교에 붙여 졸업 수용하게 한다고 의결하였다. 또한 군부 내에 교육국을 설치하고 매주 1회씩 각 위관(尉官)의 기예를 시험하도록 결정했다. 이 회의에 따라 무관학교의 교육과 사관 양성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 부족과 러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이식 및 군대 해산 등으로 인해 무관학교의 기능은 사실상 친일 일변도가 되었다. 1909년(융희 3) 무관학교가 폐쇄되고 양성 중이던 생도들은 일본 육사에 위탁되었다.
내용 및 특징
무관학교는 갑오개혁기에 일본식으로 교육하던 시기와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식으로 운영하던 두 종류의 과정이 있었다. 다만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로는 독자적인 생도 양성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98년(광무 2) 5월에 외세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무관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고종실록』 35년 5월 14일).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899년 6월에는 원수부를 설치하는 동시에 장교들에게 근대적 학문을 학습시키기 위해 우수한 사관의 일본 육사 유학을 추진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 사관생도는 3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귀국 후 중앙과 지방 군대의 중견장교로서 역할을 하였다. 고종의 군사력 장악 계획에 발맞추어 군대의 증설도 추진되었다. 1900년(광무 4) 6월에는 평안북도와 함경남도에 진위대대를 설치하였고, 7월에는 전국적인 진위대 편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1901년 정부 총예산 802만 원에서 군부 예산은 359만 원이 넘는 액수로서 전체 예산의 44.8%였다. 이런 추세는 러일전쟁 이전까지 지속되어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이 악화된 한 원인이 되었고, 일제가 한국 군대를 축소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변천
1907년(융희 1)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를 해산하자 군부의 기능은 친위보병 1대대, 기병 1중대와 무관학교 업무만을 관장하는 형태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1909년 7월 30일에 칙령 제68호로 군부의 기능은 완전히 정지되고, 남은 병력은 궁중 친위부에 부속되었다. 대한제국 군부가 관장하던 일은 한국 주재 일본군이 담당하였다. 특히 무관학교도 폐지하였고 생도들은 전원 일본 육군에 보내 사관 양성을 위탁하였다.
참고문헌
-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9, 육군본부, 2012.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 연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6.
- 임재찬, 「구한말 육군무관학교에 대하여」, 『경북사학』4 , 1982.
- 차문섭,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 『아세아연구』50 , 197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