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蒙山和尙六度普說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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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나라의 고승 몽산화상(蒙山和尙)이 저술한 『육도보설(六度普說)』를 언해한 책.

개설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蒙山和尙六度普說諺解)』는 13세기 원나라에서 활동한 몽산화상덕이(德異)가 설법한 내용을 모은 『육도보설』을 대문으로 나누어 한글로 구결을 달고 언해 한 책이다. 몽산의 여러 보설 가운데 일부 발췌하여 편집한 것으로 보이며, 그러므로 동일한 서명으로는 우리나라에만 전한다. 『몽산화상보설』이라는 서명의 책이 중국의 북경도서관에 소장된 사실로 보아, 『몽산화상육도보설』은 그 책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책은 몽산화상덕이가 중생에게 업인(業因)에 따라 윤회하는 지옥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ㆍ아수라(阿修羅)ㆍ인간(人間)ㆍ천상(天上)의 육도(六道)와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ㆍ불(佛)의 사성(四聖)을 더한 십계(十界)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결국 범부의 자리를 벗어나 성인의 지위에 들어갈 것을 권하고 있다.

편찬/발간 경위

13세기 중국의 임제종(臨濟宗)을 대표하는 몽산화상의 선(禪) 사상은 고려 후기에 수용되어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이에 몽산화상의 저술인 『몽산화상육도보설』은 『몽산화상법어약록』과 함께 한문본 및 언해본이 전국에서 간행되었다.

서지 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30.8㎝, 가로 20㎝이다.

조선시대에 『몽산화상육도보설』은 1432년(세종 14)에 간행되었으며, 이어 1472년(성종 3), 1490년(성종 21), 1497년(연산군 3)에도 간행되었다. 1497년에 간행된 책이 현재 전하고 있는데, 본문에는 구결, 난외에는 주석이 필사되어 있다. 인쇄상태가 정교하고 선명한 것으로 보아 초인본으로 판단된다. 이 판본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후 이 판본을 저본으로 번각된 간본도 10종 가량이 있다.

구성/내용

몽산화상의 『육도보설』은 승속(僧俗)이 모여 화엄경(華嚴經) 간송법회를 가진 뒤 그 공덕을 회향하기 위해 설행된 무차대회(無遮大會)에서 법회에 참여한 대중들을 위해 설해진 내용을 책으로 편찬한 것이다. 『육도보설』은 몽산의 다른 저술들과 마찬가지로 고려 말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몽산화상법어약록』과 함께 15~16세기에 가장 많이 간행된 불서이다. 이들 불서들은 조선전기 불교에 미친 몽산덕이의 영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몽산의 저술 중 조선 전기 승려들을 교육하기 위한 기본 선서(禪書)로 『몽산화상법어약록』이 간경도감에서 언해되어 유통되었던 것과 달리 『몽산화상육도보설』은 개별 사찰 단위로 전국에 걸쳐 간행되었다. 언해본도 간경도감이 아닌 지방사찰에서 조성되었으며, 판본에 따라서는 시식의문(施食儀文)이 합부되기도 하였다. 또한 몽산에게서 처음 확인되는 ‘육도보설’이라는 명칭은 한국불교에서는 나옹(懶翁)혜근(惠勤)과 득통(得通)기화(己和)에게서도 보인다. 그러나 몽산의 육도보설이 화엄경 간송과 공덕 회향을 위한 법회에서 설해진 것이라면, 혜근과 기화의 육도보설은 영가 천도를 위해 설해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조선 시대에 『몽산화상육도보설』 간행은 16세기에 집중되어 이루어졌는데, 이는 수륙재와 같은 의식에 의지하여 불교계가 유지되면서도, 선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조선 전기 불교계의 경향을 반영한 결과이다.

몽산화상덕이는 고려의 승려들과 교류가 많았는데, 특히 혜감국사(慧鑑國師)만항(萬恒), 보감국사(寶鑑國師)혼구(混丘)와 그러하였다. 이러한 교류는 고려 말 이후 한국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인수대비(仁粹大妃)가 1472년(성종 3) 세조(世祖), 예종(睿宗), 덕종(德宗), 인성대군(仁城大君)의 명복을 빌고 대왕대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펴낸 불교 서적 29종 가운데 하나가 『몽산화상법어약록』이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성종실록』 15년 2월 26일)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조선 초기에 한글로 풀어 간행한 불교서적 가운데 하나로, 불교사뿐만 아니라 초기 훈민정음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지방 사찰에서 간행된 탓에 판의 짜임새가 고르지 않고 잘못 새긴 글자도 적지 않으나, 중세 국어 말기의 특징 및 특히 간행된 지역의 방언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방점 표기가 전혀 없는데, ‘ㅿ’과 ‘ㆁ’이 사용되기는 하나 ‘ㅿ’은 혼란이 있고 ‘ㆁ’은 받침에만 쓰였다. 표기법은 당시의 국어사 자료와 같은 특징을 보인다. ‘神通力글 남진늬, 갑파’와 같이 체언과 용언 어간의 끝소리 자음이 이중으로 표기되는 중철(重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ㄷ’과 ‘ㅎ’의 구개음화를 함께 보여준다. 이들 현상은 당시 중앙에서 간행된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라도 방언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어휘에서도 이 책은 상당히 특이한 용례를 보이는데, ‘오힌(同)’, ‘에(諾)’, ‘아쇠라’가 대표적이다. ‘오힌’은 이두 ‘同’의 독법을 확인하여 주고, ‘에’, ‘아쇠라’는 감탄사로써 현대국어의 ‘아서라’와 맥락이 닿는 말들이다.

한자음 표기는 언해에 나타나는데, 모두 현실음으로 생각된다. 현대국어와 비교하여 보면, 특히 언해에서 상당한 수의 약자가 나타나고 있어, 당시 한자 사용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몽산의 어록과 저술을 간행한 고려의 고승은 거의 조계종에 속하고, 이들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조계종에서 가장 중요한 법통을 이룩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국내에서의 몽산화상의 위상과 함께 당대의 선불교의 경향을 알 수 있게 한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김무봉,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본 해제」, 『국어국문학론문집』 16,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1993.
  • 남권희, 「몽산화상육도보설 언해본의 서지적 고찰」, 『어문논총』 25, 『경북어문학』 25, 경북대학교, 1991.
  • 백두현, 「몽산화상육도보설의 국어학적 연구」, 『어문논총』 25, 경북대학교, 1991.
  • 송일기ㆍ김은진, 「몽산 덕이의 『몽산화상육도보설』 판본고」, 『한국문헌정보학회지』 45-3, 한국문헌정보학회, 2011.
  • 정우영, 「『몽산호하상육도보설언해』 해제」, 『역주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3.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