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천임(睦天任)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673년(현종 14)∼1730년(영조 6) = 58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직장(直長)이다. 자(字)는 대숙(大叔)이고, 호(號)는 묵암(默菴)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대사헌(大司憲)목임일(睦林一)이고, 어머니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예조 참판(參判)우창적(禹昌績)의 딸이다. 좌의정목내선(睦來善)의 손자이고, 좌랑(佐郞)목천현(睦天顯)의 동생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89년(숙종 15)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17세였다.[<사마방목>]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숙종과 경종이 제주도의 감귤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려주고 글을 짓게 하는 황감제(黃柑製)에서 두 차례나 수석을 차지하여, 시(詩)를 잘 짓는다고 소문이 났다.

경종 시대 활동

1721년(경종 1) 식년(式年) 문과에 갑과(甲科) 2등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9세였다.[<방목>] 경종 때 직장(直長)에 임명되어, 환관박상검(朴尙儉)과 친하게 지냈는데, 당시 왕세제(王世弟)였던 연잉군(延礽君: 영조)이 병약한 경종에게 문안하러 대궐에 올 때마다 환관들이 복도의 길을 막고 방해하였다. 소론(少論)의 승지김일경(金一鏡)이 경종을 보호하려고 환관들에게 왕세제의 문안하는 길을 가로막도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또 지관(地官)목호룡(睦虎龍)과 친하게 내왕하였는데, 1722년(경종 2) 소론 김일경이 목호룡에게 노론의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 등 4대신이 경종을 해치려고 한다고 무고(誣告)하게 하여,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일으켜서, 노론의 4대신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경종이 왕세자가 바친 게젓을 먹고 갑자기 돌아가고, 왕세제 연잉군(延礽君)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25년(영조 1) 영조는 소론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하였는데, 평소 두 사람과 가깝게 지내던 남인 목천임도 옥사에 연루되어 평안도 벽동군(碧潼郡)으로 유배당하였다.

1726년(영조 2) 남인의 중진이었던 아버지 목임일(睦林一)도 귀양을 갔다가 돌아갔으므로, 부친상을 치르기 위하여 잠시 귀향이 허락되었다.

1727년(영조 3) 영조가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취하여, 유배된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석방하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할 때 유배에서 풀려났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서, <무신난(戊申亂)>으로 확대되자, 남인 집안 출신 목천임도 그 배후로 지목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목천임은 그의 종 노미(老味)와 수택(守澤) 등이 원곡(院谷)에서 열린 변란자의 모의(謀議)에 주인 목천임도 가담하였다고 무고하였기 때문에, 목천임은 국문(鞫問)을 받다가 형장(刑杖)을 맞고 죽었는데, 향년이 58세였다.

1743년(영조 19)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취하여, <무신난> 때 억울하게 죽은 남인과 소론을 신원(伸冤)하였는데, 그때 목천임도 복관(復官)되었다.

부인과 후손

첫째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홍서복(洪敍福)의 딸이고, 둘째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는 유명천(柳命天)의 딸이다.[<방목>] 아들은 목성겸(睦聖謙)이고, 손자는 목조명(睦祖明)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현호록(東賢號錄)』
  • 『성호전집(星湖全集)』
  • 『여와집(餘窩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암집(寓庵集)』
  • 『청천집(靑泉集)』
  • 『퇴당집(退堂集)』
  • 『하려집(下廬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