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창명(睦昌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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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5년(인조 23)∼1695년(숙종 21) = 51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판서(判書)이다. 자(字)는 제세(際世)이고, 호(號)는 취원(翠園)⋅취강(翠岡)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목행선(睦行善)이고, 어머니 윤씨(尹氏)는 사헌부 장령(掌令)윤효영(尹孝永)의 딸이다. 도승지(都承旨)목장흠(睦長欽)의 손자이고, 대사간(大司諫)목성선(睦性善)의 조카이다. 정파는 남인(南人)에 속하였고, 5촌 좌의정목내선(睦來善)과 함께 탁남(濁南)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69년(현종 10)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사마방목>]

1670년(현종 11)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그 뒤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76년(숙종 2) 이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그때 5도(道) 도체찰사(都體察使)허적(許積)이 종사관(從事官) 5인을 자천하였는데, 최석정(崔錫鼎)⋅이담명(李聃命) 등과 함께 종사관에 임명되어 탁남(濁南)의 영수 허적을 수행하였다. 이때부터 영의정허적의 추천으로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응교(應敎)를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1677년(숙종 3)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숙종의 최측근이 되었다.

1678년(숙종 4)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승지(承旨)를 거쳐,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679년(숙종 5) 이조 참의로서 인사 행정을 맡아서 남인의 인사를 등용하려고 애를 썼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영의정허적이 죽음을 당하고, 남인들이 축출당하였다. 이때 목창명도 조정에서 쫓겨나서, 10여 년간 은거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이 축출되었는데, 숙종이 목창명을 패초(牌招)하여 특별히 승지(承旨)에 임명하였다. 이때 영의정권대운(權大運)⋅좌의정목내선(睦來善)⋅우의정김덕원(金德源)의 남인 정권이 출범하였다. 목창명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한성부 우윤(右尹)을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때부터 목창명은 다섯 차례 도승지에 임명되어, 5촌 좌의정목내선과 함께 남인 정권의 실세를 이루었다. 이어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다시 도승지가 되었고,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다시 도승지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690년(숙종 16) 예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겼다. 뒤이어 경기 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대사헌을 거쳐 다시 도승지가 되었고,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691년(숙종 17)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다가, 다시 도승지가 되었고, 대사간을 거쳐, 다시 도승지가 되었고,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692년(숙종 18) 대사성으로 있다가, 형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었다.

1693년(숙종 19)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금위대장(禁衛大將)이 되어, 금군(禁軍)을 이끌고 궁궐을 호위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고, 남인이 축출되었다. 목창명은 서인의 탄핵을 받고 평안도 삭주(朔州)에 유배되었다.

1695년(숙종 21) 유배지에서 풍토병(風土病)을 얻어서 갑자기 돌아갔는데, 향년이 51세였다.

1699년(숙종 25) 숙종이 죽은 목창명의 관작을 회복해 주도록 명하여, 서인의 소론 정권이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숙종 때 유배되었다가 죽은 신하 가운데 숙종이 관작을 회복시켜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로써 보면, 숙종이 목창명을 5차례나 도승지로 임명할 만큼 목창명의 충정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였기 때문이다. 숙종 때 도승지목창명과 좌의정목내선(睦來善)은 남인 정권의 실세 중의 실세였던 것이다.

부인과 후손

부인 이씨(李氏)는 이하진(李夏鎭)의 딸이다.[<방목>] 아들 목중광(睦重光)은 진사(進士)이고, 손자 목시경(睦時敬)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냈다.[족보]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갈암집(葛庵集)』
  • 『곤륜집(昆侖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귀록집(歸鹿集)』
  • 『귀암집(歸巖集)』
  • 『기축록 속(己丑錄續)』
  • 『남파집(南坡集)』
  • 『농암집(農巖集)』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도곡집(陶谷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문곡집(文谷集)』
  • 『박천집(博泉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백호집(白湖集)』
  • 『서계집(西溪集)』
  • 『서석집(瑞石集)』
  • 『서암집(恕菴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손암집(損庵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송파집(松坡集)』
  • 『수곡집(睡谷集)』
  • 『수촌집(水村集)』
  • 『식산집(息山集)』
  • 『안촌집(安村集)』
  • 『야당유고(野堂遺稿)』
  • 『약천집(藥泉集)』
  • 『양곡집(陽谷集)』
  •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담집(愚潭集)』
  • 『우헌집(寓軒集)』
  • 『육우당유고(六寓堂遺稿)』
  • 『이우당집(二憂堂集)』
  • 『정재집(定齋集)』
  • 『정재집(靜齋集)』
  • 『죽천집(竹泉集)』
  • 『창계집(滄溪集)』
  • 『청천당집(聽天堂集)』
  • 『초려집(草廬集)』
  • 『팔오헌집(八吾軒集)』
  • 『포암집(圃巖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학봉집(鶴峯集)』
  • 『학암집(鶴庵集)』
  • 『홍도유고(弘道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