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임유(睦林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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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4년(인조 12)∼1697년(숙종 23) = 64세.]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대사간(大司諫)⋅강원도 감사(監司))이다. 자(字)는 군측(君側), 또는 사아(士雅)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병조 참지(參知)목겸선(睦兼善)이고, 어머니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민형남(閔馨男)의 딸이다. 한성부 우윤(右尹)목서흠(睦敍欽)의 손자이고, 좌의정목내선(睦來善)의 조카이고, 홍문관 교리(校理)목임중(睦林重)의 형이다. 정파는 남인(南人)에 속하였다.

효종 시대 활동

1651년(효종 2)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18세였다.[<사마방목>] 음서(蔭敍)로 공조 정랑(正郎)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 1)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2세였다.[<문과방목>]

1676년(숙종 2)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되었다. 이때부터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며, 남인의 대간(臺諫)으로서 서인(西人)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1677년(숙종 3)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1678년(숙종 4)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1679년(숙종 5) 사헌부 집의(執義)이 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사헌부 집의로 있을 때 유배되어 있던 서인의 영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80년(숙종 6)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어, 사은사(謝恩使) 겸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이 임명되어, 정사(正使)심익현(沈益顯)과 부사(副使)신정(申晸)과 함께 중국 청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해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이 축출당하자, 목임유도 파직되었다. 이때부터 9년 동안 집에서 조용히 은거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서인이 축출당하고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그 뒤에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690년(숙종 16)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고, 1693년(숙종 19) 다시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4촌 목임일(睦林一: 목내선의 아들)이 대사간이 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서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이 실각하면서 삭탈관직(削奪官職: 관직을 박탈당함) 당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 도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다.

1695년(숙종 21)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지내다가, 1697년(숙종 23) 지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64세였다.

부인과 후손

첫째부인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강호(姜鎬)의 딸이고, 둘째부인 원주김씨(原州金氏)는 김진문(金震文)의 딸이고, 셋째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유정직(柳廷稷)의 딸이다.[<방목>] 장남 목천상(睦天祥)은 찰방(察訪)을 지냈고, 차남 목천조(睦天祚)는 진사(進士)이고, 삼남 목천근(睦天根)은 진사(進士)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검재집(儉齋集)』
  • 『귀암집(歸巖集)』
  • 『기언(記言)』
  • 『남파집(南坡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번암집(樊巖集)』
  • 『분애유고(汾厓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송파집(松坡集)』
  • 『야당유고(野堂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주유고(龍洲遺稿)』
  • 『우재집(迂齋集)』 『우헌집(寓軒集)』
  • 『운포유고(雲浦遺稿)』
  • 『정재집(靜齋集)』
  • 『초려집(草廬集)』
  • 『팔오헌집(八吾軒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