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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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목우자수심결언해 |
한글표제 | 목우자수심결언해 |
한자표제 | 牧牛子修心訣諺解 |
분야 | 철학/국어학 |
유형 | 문헌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조(世祖)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신미(信眉) |
간행처 | |
간행년일 | 1467년(세조 13) |
권책수 | 1책 |
소장처 | 서울대학교, 일몬 동양문고(東洋文庫)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3년 9월 23일, 『세조실록』 7년 6월 16일, 『세조실록』 11년 2월 20일 |
1467년(세조 13)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知訥)의 저술을 신미(信眉)가 언해한 책.
개설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는 고려 중기의 승려 지눌의 저술인 『수심결(修心訣)』을 신미(信眉)가 언해하여, 1467년(세조 13)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책이다. ‘목우자(牧牛子)’는 지눌의 호이다. 고려 중기에 들어서며 세속화된 불교 이념이 말폐적(末弊的) 현상이 초래하자, 지눌은 『수심결』을 통하여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대립적인 입장을 지양하고 인간의 참다운 모습을 밝히고자 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지눌이 이 책을 지은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41세 이후로 추측된다. 그는 서문에서 인간은 번뇌의 세계에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를 벗어나려면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다스리며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서술하였다. 이어 본론에서는 마음을 닦는 방법으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였다. 이는 지눌 선학의 중심사상으로 한국 선종의 수행지침이 되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수심결』을 동궁의 편당(便堂)인 비현각(丕顯閣)에서 한글로 토를 달고 혜각존자(慧覺尊者)신미가 언해하여, 1467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하였다.
서지 사항
총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23.1cm, 가로 17cm이다.
1467년 간경도감에서 펴낸 책의 판식(版式)은 사주쌍변, 유계, 매 반곽에 본문과 주석을 9항 17자 주쌍항으로 새기고 있으며, 판심에는 위·아래에 흑구와 내향흑어미를 표시하고 있다. 본문의 중간 자와 역해의 작은 자는 당대의 명필가인 안혜(安惠)를 비롯한 유환(柳睆)과 박경(朴耕) 등이 필서하였고, 각수들이 이를 새겼으며, 인쇄가 또한 잘 되어 있다.
이 책에는 『환산정응선사시몽산법어(晥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의 4종으로 흔히 『사법어(四法語)』로 일컬어지는 법어가 합각되어 있다. 글자체와 새김의 정교성은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과 비슷하므로, 같은 시기인 15세기 경에 판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500년(연산군 6)에는 경상도 합천 봉서사(鳳栖寺)에서 이 책을 중간하였는데, 그 판목(版木)이 남아 있어 근래에 쇄출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일사문고와 일몬 동양문고(東洋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수심결』을 언해하여 『목우자수심결언해』을 간행한 저자는 조선 전기 세조(世祖) 때의 승려인 신미이다.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본명은 김수성(金守省)이고, 사호는 혜각존자(慧覺尊者)이며, 본관은 영동이다. 그의 아버지는 옥구진의 병사였던 김훈(金訓)이고, 동생은 조선 초기 대표적 문신인 김수온(金守溫)이다. 신미는 출가 후 법주사에서 불도를 공부하였고, 세조 대에는 국책 사업으로 해인사(海印寺)에 있던 대장경 50부를 간행할 때 이를 감독하였다.(『세조실록』 3년 9월 23일) 1461년(세조 7)에는 왕의 명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하고,(『세조실록』 7년 6월 16일) 훈민정음의 보급을 위하여 불전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고 간행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그 결과 간경도감에서는 『법화경(法華經)』ㆍ『반야심경(般若心經)』ㆍ『영가집(永嘉集)』 등을 언해하였고,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등도 교정, 간행하며 불경 번역에 큰 역할을 하였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로 행차하였을 때 신미는 그곳에서 대설법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에 임금에게 상원사(上院寺)의 중건을 건의하여 이듬해인 1465년(세조 11) 상원사를 구축하였다.(『세조실록』 11년 2월 20일) 세조는 그를 매우 존경하여 ‘혜각존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목우자수심결언해』는 고려의 승려 보조국사지눌이 지은 한문본 『수심결』을 신미가 우리말로 언해한 책이다. 지눌은 『수심결』의 서두에서 괴로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부처를 이루는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이고 자기 성품이 참다운 법임을 알지 못해 밖에서만 찾는다고 적었다. 이어 9문 9답을 통해 마음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체계화하였다.
신미는 『수심결』을 언해한 후 지눌의 호 ‘목우자’를 앞에 붙여 『목우자수심결』이라고 불렀으나, 한문본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일반적으로 『목우자수심결언해』라고 부른다. 이 책은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다른 여러 책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표기법, 문법, 어휘 등에서 특이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어, 중세 한국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이 책에 나타난 표기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쓰였고, 방점과 ‘ㆍ’, ‘ㆁ’, ‘ㆆ’, ‘ㅿ’, ‘ㅸ’이 쓰였으며, ‘ㅿ’의 쓰임에는 혼란이 없었다. 둘째, ‘ㆁ’이 초성과 종성에 모두 쓰였으며, ‘ㅸ’이 부사 파생접미사 ‘-이’와 결합할 때만 쓰였으며, ‘ㆆ’은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였다. 셋째, 고유어의 각자병서 표기에서 매우 드물게 ‘ㅆ’만 쓰였고, 합용병서는 정음창제 초기문헌의 것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넷째, 자음동화(비음화)가 반영된 형태와 반영되지 않은 형태가 공존하며, 모음조화가 잘 적용되지 않았다. 다섯째, ‘나-(ㅎ+나-)’, ‘가(‘가치’의 속격형)‘, ’보조사 –곳/옷’이 공존하는 것과 같은 표기들이 보인다.
또한 고유어 어휘로 ‘모ᄃᆞᆫ’, ‘ᄃᆞᆯ-’, ‘맛들-’, ‘맛보-’, ‘날혹ᄌᆞᄂᆞ기’가 보이며, 그 외에 ‘가야’, ‘구여’, ‘ᄂᆞ외야’, ‘도ᄅᆞ’, ‘비르서’, ‘버거’, ‘眞實로’, ‘恒常애’, ‘往往애’ 등을 부사화한 경우도 보인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자료에 대한 종합적 연구」, 『규장각』3 , 서울대학교, 1979.
- 정우영, 「『목우자수심결언해ㆍ사법어언해』 해제」, 『역주 목우자수심결언해ㆍ사법어언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9.
- 정우영, 「한글 불전류(佛典類)의 역주 방법론 연구」, 『국어사연구』 12, 국어사학회, 2011.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