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선(睦性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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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7년(선조 30)∼1647년(인조 25) = 51세.]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대사간(大司諫)⋅경상도 감사(監司)이다. 자(字)는 성지(性之)이고, 호(號)는 병산(甁山)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도승지(都承旨)목장흠(睦長欽)이고, 어머니 남씨(南氏)는 군자감 주부(主簿)남위(南瑋)의 딸이다. 이조 참판목첨(睦詹)의 손자이고, 홍문관 수찬(修撰)목취선(睦取善)의 4촌 동생이며, 영의정목내선(睦來善)의 4촌형이다. 정파는 남인(南人)에 속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에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문과방목>]

1625년(인조 3)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예문관 검열로 재직 중, 목성선은 친구 승문원 부정자유석(柳碩)과 함께 인조에게 유배된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너그럽게 용서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인성군 이공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에 앞장서서 찬성하였기 때문에,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서인들의 탄핵을 당하다가, 역모에 연루되었다고 잇달아 무고(誣告)를 당하여 유배되었다. 인성군 이공(李珙)은 선조의 서출 제7왕자로서 인품이 훌륭하였기 때문에, 선조의 서출 제5왕자 정원군(定遠君)의 아들인 인조의 왕위 계승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에 서인의 대신들과 대간들이 인성군의 처형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남인 목성선은 당파를 초월하여 인조에게 숙부 인성군을 보호하도록 직언(直言)하였다. 이에 인조는 목성선의 충정(忠情)을 높이 평가하여, 대간(臺諫)들이 계속 탄핵하였으나, 목성선을 보호하고, 승지(承旨)로 발탁하여 최측근으로 두고 어려운 정사를 맡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목성선은 인조 시대에 비교적 무난하게 관계에서 활동하며 능력과 기량을 발휘했던, 당시 재능 있는 관료라고 높이 평가되었다.

1626년(인조 4)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사헌부 헌납(獻納)이 되었다.

1628년(인조 6) 북인 유효립(柳孝立)의 역모(逆謀)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인성군도 역모에 연루되어, 서인의 대간들이 계속해서 인성군의 처형을 주장하고, 아울러 목성선과 유석도 탄핵하였다. 그해 5월에 인조는 인성군에게 자진(自盡)하도록 명하였으나, 목성선과 유석을 보호하였다.

1629년(인조 7) 예조 정랑(正郎)에 임명되었으나, 청서파(淸西派)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634년(인조 12) 경기 안산죽산현감(竹山縣監)으로 자청하여 나갔는데,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암행어사(暗行御史)김수익(金壽翼)이 경기 지방을 염찰하고 돌아와서 인조에게 죽산현감목성선의 치적(治績)이 가장 으뜸이라고 보고하였다.

1637년(인조 15) 문무(文武)를 겸전한 유장(儒將)으로 목성선과 정태화(鄭太和) 등 4명이 선발하였는데, 목성선은 공서파(功西派)의 영수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뽑혔던 것이다. 이로써 보더라도 목성선은 문무를 겸전한 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638년(인조 16)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고, 1639년(인조 17)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를 승진되었다. 이어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인조의 측근이 되었다.

1640년(인조 18) 우승지(右承旨)⋅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고, 그 뒤에 황해도 감사(監司)로 나갔다.

1641년(인조 19) 다시 우승지⋅좌승지가 되어, 인조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1644년(인조 22) 전라도 감사로 나가서, 남부 해안 지방을 철저하게 방어하였다.

1645년(인조 23)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인조에게 두 차례의 호란(胡亂) 이후에 혼란한 정국을 바로잡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건의하였다.

1647년(인조 25) 남쪽 해안 지방이 불안해지자, 경상도 감사로 특별히 임명되어, 임지에 부임한 지 2개월 만인 그해 9월 6일에 감영(監營)에서 갑자기 돌아갔는데, 향년이 51세였다.[『인조실록』 25년 9월 6일 1번째기사]

성품과 일화

『실록(實錄)』의 졸기(卒記)를 보면, “목성선은 침착하고 묵직하며 기량(器量)이 있었다. 일찍이 전라도 감사로 나갔는데, 상당히 능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남쪽 해안 지방이 불안하다고 하여 경상도 감사를 엄선하여 보내기로 하였는데, 목성선이 승지로 있다가, 경상도 감사로 임명되어,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돌아가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하였다.

부인과 후손

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는 유시행(柳時行)의 딸이다.[<방목>] 아들 목창조(睦昌朝)는 진사(進士)이고, 손자 목중정(睦重廷)는 별검(別檢)을 지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서일고(溪西逸稿)』
  • 『계암집(溪巖集)』
  • 『곡운집(谷雲集)』
  • 『광해초상록(光海初喪錄)』
  • 『구암집(歸巖集)』
  • 『구전집(苟全集)』
  • 『기언(記言)』
  • 『남계집(南溪集)』
  • 『당촌집(塘村集)』
  • 『대산집(臺山集)』
  • 『동계집(桐溪集)』
  • 『동주집(東州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만랑집(漫浪集)』
  • 『만오집(晩悟集)』
  • 『망와집(忘窩集)』
  • 『목재집(木齋集)』
  • 『묵재일기(黙齋日記)』
  • 『문곡집(文谷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강집(白江集)』
  • 『백주집(白洲集)』
  • 『백헌집(白軒集)』
  • 『서경집(西坰集)』
  • 『서계집(西溪集)』
  • 『서주집(西州集)』
  • 『서하집(西河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소전집(少痊集)』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식암유고(息庵遺稿)』
  •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양파유고(陽坡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리집(梧里集)』
  • 『외재집(畏齋集)』
  • 『월봉집(月峯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월당집(月塘集)』
  • 『죽소집(竹所集)』
  • 『지호집(芝湖集)』
  • 『창석집(蒼石集)』
  • 『태계집(台溪集)』
  • 『퇴당집(退堂集)』
  • 『호주집(湖洲集)』
  • 『활재집(活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