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린덕(穆麟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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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독일 외교관이자 언어학자로 조선 정부의 고문을 역임한 인물.

개설

목린덕은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의 한자식 표기이다. 괴를리츠(Görlitz)에서 김나지움을 다닌 묄렌도르프는 1865년에 할레대학교(University of Halle)에 입학해서 법학, 동양학(oriental studies), 그리고 언어학을 전공하였다. 묄렌도르프는 중국 천진 주재 독일 영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869년부터 청의 해관에서 근무하였다. 1882년에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초기에는 해관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으나, 그의 활동 범위는 외교 및 재정 분야로 확대되었다. 1885년 7월에 한러밀약설로 조선의 관직에서 물러나서 청국으로 돌아갔다.

활동 사항

1882년 10월에 청국을 방문한 조영하가 이홍장에게 해관 업무를 가르쳐 줄 외국인 고문의 초빙을 의뢰하였다. 이에 이홍장은 마건상과 더불어 천진 주재 독일 영사관과 청국 해관에서 근무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추천하였다. 묄렌도르프는 1882년 12월에 조영하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으며, 고종은 묄렌도르프를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참의(參議)에 임명하고(『고종실록』 19년 11월 17일), 통리기무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하 외아문)으로 개편하면서, 묄렌도르프는 외아문의 참판이 되었다(『고종실록』 19년 12월 5일).

묄렌도르프는 1883년에 상해로 건너가서 차관 교섭과 더불어 조선 해관에서 근무할 관리를 모집하였으며, 고종의 명령으로 12마력의 화륜기기를 구매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20년 5월 11일). 1883년 7월에는 부관의 자격으로 주조선 일본 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 [하나부사 요시모토])과 조일통상장정 체결에 합의를 보았다. 1884년 7월에는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과정에 부전권대신으로 협상 과정에 참여하였다.

전환국(典圜局) 총판(總辦)으로 임명된(『고종실록』 21년 2월 17일) 묄렌도르프는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여 조선 정부의 재정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민씨 척족 세력의 재정 정책을 지지하는 것이었는데, 김옥균은 당오전의 발급이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킨다는 이유로 묄렌도르프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1885년 1월에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의 일환으로 조선과 일본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자, 묄렌도르프는 부대신(副大臣)에 임명되어서 특명전권대신 서상우(徐相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고종실록』 21년 10월 27일). 묄렌도르프는 일본 정부에 김옥균의 체포와 조선으로 송환을 요구하였지만, 일본 측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한편 묄렌도르프는 일본에 있으면서 주일 러시아 외교관들을 접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묄렌도르프가 러시아 세력을 조선 정세에 끌어들인다는 의심을 받았다. 한편 갑신정변 직후 청과 일본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 주조선 독일영사 부들러가 제안한 한반도 중립화론의 작성과정에 묄렌도르프가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5년 4월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묄렌도르프는 엄세영과 함께 거문도를 방문해서 영국 함대에 영국 국기를 내리고 즉각적으로 거문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고종실록』 22년 4월 3일). 이어서 묄렌도르프는 장기(長崎)를 방문해서, 그곳에 주둔 중인 영국 함대 부제독 도웰에게도 영국의 거문도 철수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1885년 6월에 조선을 방문한 러시아의 쉬페이예르(A. H. Speyer)가 영국의 거문도 철수와 러시아 군사교관의 조선 파견을 주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묄렌도르프가 러시아 군사고문단 파견과 더불어 한러밀약설을 추진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이홍장은 묄렌도르프의 해임을 조선 정부에 주장하였으며, 서울 주재 영국총영사 애스턴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 김윤식에게 묄렌도르프의 해임을 요구하였다. 결국 고종은 묄렌도르프를 협판 직에서 해임시켰다.

학문과 사상

만주어를 라틴문자로 옮겨 적는 묄렌도르프 표기법을 창안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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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