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극등(穆克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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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의 국경을 조사하여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청의 관원.

개설

목극등은 1684년에 강희제의 시위로 임명되었다. 1698년에는 오라총관으로 임명되었다. 1712년 황제의 명령으로 청 정부의 대표로 조선 정부 측에서 파견한 이의복(李義復)·조태상(趙台相) 등과 함께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여 양국의 국경을 표시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1719년 길림부도통(吉林副都統)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길림·오라가의 팔기병전봉통령(八旗兵前鋒統領)에 제수되었다. 1735년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목극등은 길림시 오라가(烏喇街)에서 출생하였다. 1698년 오라총관(烏喇摠管)으로 임명되었고, 1712년 황제의 명령을 받고 조선 정부 측 대표와 함께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여 조선과 청국 간의 국경을 정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는 이전부터 청국과 조선 측 백성들이 내왕 또는 거주하면서 양측 간에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역이었다. 1711년 목극등은 압록강 일대에서 조선 측 대표와 함께 범월(犯越) 문제를 조사하였으며(『숙종실록』 37년 6월 6일), 이듬해인 1712년 강희제의 명령으로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정하고자 하였다(『숙종실록』 38년 2월 24일).

1712년 2월 청 정부는 목극등을 장백산(백두산)에 보내 국경을 답사하려 하니 협조해 달라는 공문 서신을 보냈다(『숙종실록』 38년 2월 27일). 이에 조선 정부에서도 접반사박권(朴權)과 함경감사이선부(李善溥)를 파견하여 함께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박권과 이선부가 노쇠하여 함께 답사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목극등은 그들을 제외하고 접반사 군관이의복(李義復), 순찰사 군관조태상(趙台相), 거산찰방(居山察訪)허량(許樑), 나난만호(羅暖萬戶)박도상(朴道常), 역관(譯官) 김응헌(金應瀗)·김경문(金慶門) 등과 함께 조사하였다.

조사 이후 목극등은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남북을 갈라 정하자는 조선 측의 의견을 묵살하고 청측이 의도한 대로 백두산 정상이 아닌 동남쪽 4㎞, 해발 2,200m 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다. 정계비의 비면(碑面)에는 위쪽으로 대청(大淸)이라 적고 그 밑에 ‘오라총관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 오십일년 오월 십오일[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 명기하고, 또 수행원의 성명도 함께 기록하였다.

이후 1881년 청국 측에서 간도를 개척하려 하자, 조선 정부가 정계비를 조사하고 그곳이 조선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 측은 토문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면서 양측 간에 분쟁이 계속되었다(『고종실록』 21년 6월 17일).

1719년 길림부도통(吉林副都統)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길림·오라가의 팔기병전봉통령(八旗兵前鋒統領)에 제수되었다. 1732년 신강(新疆)으로 출병하여 수비하였으며, 내무대신에 임명되었다. 1735년에 사망하였다.

상훈 및 추모

광록대부(光祿大夫)

참고문헌

  • 이화자, 『한중국경사연구』, 혜안, 2011.
  • 이상태, 「조선후기 외교사: 백두산정계비 설치와 김지남의 역할」, 『실학사상연구』 33, 2007.
  • 이원명, 「백두산정계비와 접반사 박권에 관한 일고찰」, 『백산학보』 8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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