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겸선(睦兼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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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9년(광해군 1)∼1665년(현종 6) = 57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승지(承旨)⋅사간원 사간(司諫)⋅병조 참지(參知)이다. 자(字)는 달부(達夫)이고, 호(號)는 용재(容齋)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우윤(右尹)목서흠(睦敍欽)이고,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판관(判官)권탁(權晫)의 딸이다. 이조 참판목첨(睦詹)의 손자이고, 도승지(都承旨)목장흠(睦長欽)의 조카이고, 좌의정목내선(睦來善)의 셋째 형이다. 정파는 남인(南人)에 속하였는데, 주로 대간(臺諫)에서 활동하며 서인(西人)과 싸우는 데에 앞장섰다.

인조 시대 활동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사마방목>] 음서(蔭敍)로 참봉(參奉)을 지내다가, 1644년(인조 22)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1647년(인조 25)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효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 효종이 8도(道)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보내어 민정(民情)을 살펴볼 때 암행어사로 차출되었다.

1650년(효종 1) 사헌부 지평에 다시 임명되었고, 1654년(효종 5)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1655년(효종 6) 추쇄어사(推刷御史)에 임명되어, 경기 지방에서 도망한 노비를 추쇄(推刷: 찾아내어 주인에게 돌려줌)하였다. 이어서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1656년(효종 7)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다시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1657년(효종 8)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이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고,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1658년(효종 9)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교리가 되었고,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659년(효종 10)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 다시 사간원 사간이 되어,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격렬한 논쟁을 벌일 때에 4촌 동생 헌납목내선(睦來善)과 함께 서인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기년복(朞年服)’ 주장을 공박하고 남인 윤선도(尹善道)와 윤휴(尹鑴)의 삼년복(三年服)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 뒤에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정사(正使)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과 부사(副使)남노성(南老星)과 함께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왔다. 마침내 <예송(禮訟) 논쟁>에서 승리한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남인의 영수들을 유배하였다.

1660년(현종 1)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 목겸선이 집의가 되었을 때 대간(臺諫)에서 남인의 영수 윤선도를 탄핵하여, 유배시키려고 하자, 이를 막으려고 하다가, 도리어 대간에서 쫓겨났다.

1661년(현종 2) 다시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그러나 대간에서 서인의 동료들과 갈등이 많아지자, 목겸선은 스스로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여 충청도청풍군수(淸風郡守)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해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이 완성되었는데, 현종이 편수관으로 참여한 목겸선 등에게 가자(加資)하였다.

1664년(현종 5)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나, 집안에 질병이 있다고 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는데, 그때 장안에 전염병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인 출신 대간들의 탄핵으로 인하여 동부승지에서 파직되었다. 그 뒤에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승지(承旨)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목겸선은 병을 핑계하고 한직인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로 있다가, 1665년(현종 6)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57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고 과감하여, 남인의 대간으로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공격하고 남인의 영수 윤선도를 보호하려고 애를 썼으며, 왕가에서 농민의 전토(田土)를 강제로 점거하여 궁방전(宮房田)으로 만들고, 또 어민의 어량(魚梁)을 강제로 점탈하여 각 궁방(宮房)에 소속시키는 것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 8월에 대간에서 남인의 윤선도를 탄핵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발론(發論)을 논의할 적에 서인 출신 간관(諫官)들이 계속 윤선도를 탄핵하려고 하자, 사간원 사간목겸선이 이를 임의로 중단시켜버리자, 같은 동료 대간들이 사간목겸선을 체직하라고 현종에게 청하였다. 그때 사간원 헌납김익렴(金益廉) 등이 현종에게 아뢰기를, “윤선도에 대해서 비록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사간목겸선이 동료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윤선도에 대하여 거듭 탄핵하는 것을 정지시켜 버렸습니다. 목겸선을 체차하고, 다시 윤선도를 체포하여 국문하고 그 죄를 정하게 하소서.”하니, 현종이 목겸선의 체차를 허락하였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8월 5일 2번째기사]

1660년(현종 1) 12월에 사헌부 집의목겸선과 장령(掌令)윤비경(尹飛卿)이 아뢰기를, “통진(通津)에 신설한 해량(蟹梁: 게를 잡는 어량) 2개소를 수진궁(壽進宮)에서 차지하고 궁노(宮奴)를 보내어 불법으로 게를 침탈하여 백성들에게 피해가 많습니다. 속히 새로 설치한 해량을 혁파하고 폐단을 일으킨 궁노를 법에 따라 다스리소서.”하였으나, 현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현종실록』 1년 12월 26일 1번째기사]

부인과 후손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민형남(閔馨男)의 딸이다. 장남 목임유(睦林儒)는 문과에 급제하여, 감사(監司)를 지냈고, 차남 목임중(睦林重)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경현재집(警弦齋集)』
  • 『남계집(南溪集)』
  • 『동명집(東溟集)』
  • 『명곡집(明谷集)』
  • 『목재집(木齋集)』
  • 『백강집(白江集)』 『송자대전(宋子大全)』
  • 『양파유고(陽坡遺稿)』
  • 『염헌집(恬軒集)』 『은봉전서(隱峯全書)』
  • 『잠곡유고(潛谷遺稿)』
  • 『태계집(台溪集)』
  • 『한사집(寒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