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호옥(名護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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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명호옥 |
한글표제 | 명호옥 |
한자표제 | 名護屋 |
상위어 | 임진왜란(壬辰倭亂), 문록(文祿)·경장(慶長)의 역(役) |
관련어 | 대마(對馬), 명호옥성(名護屋城), 종의지(宗義智), 종씨(宗氏), 풍신수길(豊臣秀吉), 좌하현(佐賀縣)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지명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장순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명호옥(名護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7년 11월 8일, 『선조실록』 28년 4월 19일, 『선조실록』 27년 11월 8일 |
임진왜란 당시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현재 일본 구주 지역을 이르던 말.
개설
비전국(肥前國) 송포군(松浦郡)에 위치했으며 현재의 구주 좌하현(佐賀縣) 당진시(唐津市) 진서정(鎭西町)의 지명이다. 고대에는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인 견당사(遣唐使)의 기항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일본 중세 때에는 송포당(松浦黨)의 교역거점 가운데 하나로, 원래는 송포당의 파다씨(波多氏)의 일족인 명호옥씨(名護屋氏)의 성이 있었던 곳이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풍신수길은 1591년에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를 비전(肥前)의 명호옥으로 정하고, 바닷가에 명호옥성(名護屋城)을 축조하였다.
1592년(선조 25)에는 15만 8000여 명의 일본군이 9개 군으로 편성되어 그해 4월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종의지(宗義智) 휘하의 제1진(陣)이 조선을 침략한 것을 시작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풍신수길은 3월 26일에 교토의 취락제(聚楽第)를 출발하여 4월 25일 명호옥성으로 옮겨와 전쟁을 진두지휘하였다(『선조실록』 27년 11월 8일). 또한 명호옥은 정유재란 당시에도 전쟁물자의 보급과 운송로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형성 및 변천
구주평정(九州平定)을 단행한 직후인 1587년부터 풍신수길은 대마(對馬)의 종씨(宗氏)를 통하여 조선에 일본에 대한 조공과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마도주 종의지를 통하여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풍신수길은 1591년에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를 비전의 명호옥으로 정하고, 바닷가에 명호옥성을 축조하였다.
명호옥성은 파호갑(波戶岬)의 구릉을 중심으로 170,000평방미터에 걸쳐 축조된 평산성(平山城)의 진성(陣城)이다. 오중천수(五重天守)와 어전(御殿)이 세워지고, 주위 약 3㎞ 내에 120개소 정도의 병영이 설치되었다. 명호옥성 축조 당시 풍신수길은 전국의 여러 대명(大名)으로 하여금 명호옥에 병영을 설치하고 가신단을 거느리고 주둔하도록 명하였다(『선조실록』 28년 4월 19일). 일설에 따르면 명호옥성은 풍신수길의 고향인 명고옥(名古屋)에서 따온 것으로 가운데 글자만 ‘고(古)’에서 ‘호(護)’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1592년(선조 25)에는 가등청정(加藤淸正) 등 서국대명(西國大名)을 중심으로 한 15만 8000여 명의 일본군이 9개의 군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그해 4월 소서행장과 종의지 휘하의 제1진이 조선을 침략한 것을 시작으로 명호옥을 출발한 여러 부대가 일기(壹岐)·대마(對馬)를 거쳐 조선으로 건너왔다. 이것이 임진왜란이다.
풍신수길은 같은 해 경도의 취락제를 3월 26일에 출발하여 4월 25일 명호옥성으로 옮겨와 전쟁을 진두지휘하였다(『선조실록』 27년 11월 8일). 또한 당시 명호옥성에는 서국대명이 침략을 위해 조선으로 건너간 후에 동국대명과 풍신수길 휘하의 군사 10만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마침 조선에서의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면서 1593년 4월에 강화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풍신수길은 1597년 2월부터 14만 명의 군사로 조선을 재침략하였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왜란 당시에도 명호옥은 전쟁물자의 보급과 운송로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성 주위에는 성하정(城下町)이 세워져 번성했을 때에는 인구가 10만 명을 넘을 정도여서 쌀 가격이 경도(京都)·박다(博多)보다도 높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명호옥에는 조선 침략을 준비하면서 주둔하고 있던 가신단과 군사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상공업자가 모여 살았고, 사원도 건립되었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명에서도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건축 재료를 다루는 재목정(材木町)·판옥정(板屋町), 무구와 무기를 취급하는 병고옥정(兵庫屋町)·도정(刀町), 식품을 취급하는 어정(魚町)·영옥정(鹽屋町), 포목을 취급하는 천옥정(茜屋町), 장인(職人)의 석옥정(石屋町), 어부인 해사정(海士町), 뱃사람들의 수주정(水主町), 유곽이 있는 여랑정(女郞町) 등이 그 예이다.
임진·정유왜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여러 대명이 명호옥에서 철수함에 따라 그곳에 머물던 상공업자도 떠나게 되었고, 그 결과 명호옥은 쇠퇴하게 되었다. 또한 명호옥성도 1598년 9월 풍신수길이 사망함에 따라 폐성(廢城)이 되었으며, 건물은 당진성(唐津城)으로 이축되었다고 한다. 석담도 강호시대(江戶時代)의 도원(島原)의 난 이후에 민란으로 인한 농성 등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분만 남아 있다. 최근 명호옥 성터와 진지 23개가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정비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89.
- 北島万次, 『豊臣秀吉の朝鮮侵略』, 吉川弘文館, 1995.
- 寺崎宗俊, 佐賀新聞社編集局編, 『肥前名護屋城の人々 -秀吉の朝鮮侵略四百年』, 佐賀新聞社, 1993.
- 松本豊壽, 「城下の大基地の町, 肥前名護屋」, 『地理學評論』45-3, 日本地理學會, 197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