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천산성(明川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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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산성으로 조선선조 때 이수일이 다시 개축한 산성.

개설

명천산성은 험준한 지세와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선조대에 길주산성(吉州山城)과 함께 수축이 이루어졌다.

위치 및 용도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에 있는 산성으로 험준한 지세로 인하여 함경북도의 중요 방어시설로 논의되었다.

변천 및 현황

명천산성의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05년(선조 38) 동부승지이선복(李善復)이 아뢰기를, “함경감사의 서장에 운운한 것에 대해 재가하셨습니다. 명천산성은 장계에 진달한 것으로 보건대 그 형세가 몹시 좋은 곳이니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수축하여 꼭 지켜야 할 곳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장계에 의하여 먼저 고참창(古站倉)을 성중으로 옮겨 추수한 곡식을 거둬들여 쌓게 하고 인민을 불러들인 다음 잡역 일체를 면제하며 묵은 밭을 개간하여 생활할 수 있게 만든다면 반드시 나오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봄이 되는 즉시 수선하게 하소서.”(『선조실록』38년 9월 13일) 하여 왕의 재가를 받게 되니 이때에 수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함경감사이시발(李時發), 방어사(防禦使)이수일(李守一) 등은 명천산성의 험준한 지세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들어 길주산성과 함께 중요 방어시설로 적극 건의하였다. 1606년 기사에 “명천산성도 이미 완전히 마무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이 스스로 견고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지킬 수 있는 것이니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특별히 구휼해주어 단란하게 모여 살게 함으로써 성을 지키는 밑받침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집안 전체가 유배형을 받은 자들 중에 죄목이 조금 가벼운 자들을 해당 관리를 시켜 이 성으로 정배케 해야 할 것입니다.”(『선조실록』39년 12월 3일)라고 하여 성의 수축이 완공되었음과 백성들을 성내로 모이게 하여 농사를 짓게 하고 성을 방어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1606년 실록에 “성의 둘레가 포척(布尺)으로 4,900여 척(약 13㎞)이고 안에 성가퀴는 383개이고, 성문은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세 곳이며 성문 위에는 성루를 지었고, 객사도 이미 짓고서 앞으로 단장하려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선조실록』39년 12월 3일).

관련사건 및 일화

참고문헌

  • 『징비록(懲毖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