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률(明律)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형조에 소속된 율학(律學)의 종7품 관직.

개설

조선시대 명률(明律)은 형조에 속한 율관직인 종8품 심률(審律), 종9품 검률(檢律)과 더불어 소송, 법률, 노예 등 법률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정원은 1명으로 율학 출신의 기술관이 임명되었다.

담당 직무

조선왕조는 개국 이듬해인 1393년(태조 2)에 형조에 율학을 설치한 뒤(『태조실록』 2년 10월 27일), 1397년(태조 6)에는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을 시험관으로 임명하여 시험을 치러 형률을 다루는 명률 7명을 선발하였다(『태조실록』 6년 2월 22일). 율학은 형조에 속한 기관 가운데 하나로 1434년에 사율원(司律院)으로 개칭했다가(『세종실록』 16년 8월 26일), 세조가 관제를 개혁할 때 다시 율학으로 바꾸면서 명률을 소속시켰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조선시대 법전 운영의 전문적인 실무와 교육을 담당한 기관인 율학청에는 종6품 율학교수(律學敎授)·별제(別提), 종7품의 명률을 비롯해 종8품 심률, 정9품 율학훈도, 종9품 검률을 두었으며, 8도 및 제주에는 검률 각 1명을 두었다. 8도에 파견된 율관은 각 지방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조사하여 죄를 다스리고 벌하는 임무를 맡았다.

명률 이하의 율학 관직은 임시직인 체아직(遞兒職)으로 참상관이나 참하관을 막론하고 합의하여 재능을 시험하는 화회취재(和會取才)를 시행하였다. 1년에 두 차례 실시하는 인사 행정인 양도목(兩都目)으로 근무 일수 514일이 차면 한 품계를 올려주되 종6품이 되면 그 직에서 물러나도록[去官] 하였다. 그 직에 계속 근무하기를 원하는 자는 그때부터 근무 일수 900일이 차면 한 품계를 올려주고 정3품에서 그치도록 규정하였다. 관직을 떠나지 않는 자는 모아서 화회취재하였으며, 취재 시험에서 점수가 가장 높은 자는 정식으로 관직을 주고, 차점을 차지한 자는 지방관으로 보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이남희, 『조선후기 잡과중인 연구』, 이회문화사, 1999.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번역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 이남희, 「조선전기의 율관」, 『한국학보』 15 ,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