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간노(明看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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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조대 회령 지역에 거주한 여진족 추장.

개설

명간노(明看老)는 회령(會寧) 일대에 거주한 번호(藩胡)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육진 지역의 번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때, 다른 여진인과 함께 회령 등지를 공격하였다. 북병사(北兵使)이일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토병(土兵) 강억필 등 30명을 보냈으나, 명간노 등에게 살해당하였다. 이후 조선 조정은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의 발발로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은 조선의 통제에서 벗어나 육진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후 조선은 두만강 유역의 번호에 대하여 회유책과 함께 반항하는 세력을 응징하며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호 중 노토(老土)와 같은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 육진의 번호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1599년에 누르하치[奴兒哈赤, 老乙加赤]가 노토의 부락을 정벌하여 자신의 세력 아래에 두었다. 누르하치는 무산(茂山)에 거주하는 노토를 발판으로 두만강 유역의 번호에게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1600년에도 회령의 번호인 명간노 등이 누르하치에게 귀부한 뒤, 회령 등처의 번호를 공격하였다. 북병사이일은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하여 토병 강억필 등 30여 명을 노토에게 보냈으나 살해당하였다(『선조실록』 32년 3월 28일).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자 조선 조정은 노토의 침략 및 번호 해체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조정은 본보기로 한두 부락을 탕멸하는 방안, 유능한 변장의 배치 등을 논의하며 북도 방어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토 등을 공략하기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조정이 취한 대책은 회유책이었다. 그 방안으로 조선은 이전부터 육진의 번호에게 관찰사와 북병사 등이 순회하며 잔치를 베풀어 주거나 무산보 등에 개시(開市)를 허용하였다.

조선은 이와 같은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명간노가 조선 토병을 살해하기까지 하자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은 번호가 명간노를 체포하여 항복해 오면 회령의 보을하진(甫乙下鎭)에서 납관(納款)을 허락하겠다고 밝혔다(『선조실록』 33년 1월 26일). 그러나 이 방법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02년(선조 35) 6월에 비변사에서 명간노 등을 회령으로 잡아 보내 그 죄목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형장(刑杖)을 치자고 주장할 정도로 이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였다(『선조실록』 35년 6월 16일). 이후에도 명간노의 아들 등이 여전히 조선의 관할 하에 있던 고령(高嶺)의 독소부락(篤所部落) 등을 공격하며 조선을 괴롭혔다.(『선조실록』 35년 7월 10일)

참고문헌

  • 『북관지(北關志)』
  • 『장양공전서(壯壤公全書)』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서병국, 『宣祖時代女直交涉史硏究』, 교문사, 1970.
  • 稻葉岩吉, 「淸初の疆域」, 『滿洲歷史地理』 2,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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