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군(沔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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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면천군(沔川郡)은 조선시대 충청도 충주목에 속한 군이다. 고려 말에 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15세기에 호수는 405호, 인구는 3,155명이었다. 토지는 4,053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4/9 정도였다. 군정은 234명인데 그중에 선군(船軍)이 195명으로 압도적이었다. 진관 체제에서는 홍주진관에 속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종6품 절제도위를 두었는데 나중에 종4품 동첨절제사 지역으로 승격시켰다. 1914년에 당진군 면천면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백제 때의 명칭은 혜군(槥郡)이었다. 통일신라에서는 혜성군(槥城郡)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고려 현종 9)에 지금의 홍성 지역인 운주(運州)의 속현으로 삼았고, 뒤에 감무를 두었다. 1290년(고려 충렬왕 16)에 이 지역 사람인 복규(卜奎)가 거란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므로 지면주사(知沔州事)로 승격시켰다. 이것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면천은 선군의 수가 압도적인 데서 알 수 있듯이 해안 방어와 해상 교통로상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 초에 충청도 조운을 모두 면천으로 운송해서 범근내(犯斤乃)에 창고를 두었다. 그러나 1477년(성종 8)에 면천의 창고를 공세곶(貢稅串)의 창고로 옮기면서 조운상의 중요성은 약화되었다(『성종실록』 8년 11월 27일). 그러나 면천은 경기도와 가까운 지역으로 조선후기까지도 주요 해산물과 소금의 산지였으며, 교통과 해상 운송로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여건으로 인하여 해안가 지역을 궁방과 권세가에게 강제로 빼앗기기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4품 군수이다. 좌수 1명, 별감 2명, 창감 2명, 군관 30명, 아전 34명, 영리 15명, 지인 20명, 사령 22명, 관노 12명, 관비 11명을 두었다. 행정단위가 군임에도 불구하고 영리가 15명이나 있는 것은 산물이 많고 운송과 상업 면에서 주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고을의 풍속이 열심히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재물을 숭상하고 여러 가지 수단으로 이익을 추구한다고 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14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가호는 편호로 4,203호, 인구는 남자가 7,020명, 여자가 7,409명이었다. 토지는 한전이 3,788결, 논이 2,149결이었다. 1914년에 전국의 면리를 개편할 때 당진군에 합쳐져 면천면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