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신(免新)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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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면신 |
한글표제 | 면신 |
한자표제 | 免新 |
상위어 | 행정의례(行政儀禮) |
동의어 | 면신례(免身禮), 면신벌례(免身罰禮), 신면(新免) |
관련어 | 신참례(新參禮), 대선생(大先生), 허참례(許參禮) |
분야 | 사회/향촌 |
유형 | 관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정승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면신(免新)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5년 1월 21일, 『현종개수실록』 6년 7월 12일 |
조선시대 새로 관직에 임명된 관원이 선배 관원들에게 성의를 나타내는 의식.
개설
면신(免新)은 면신례(免新禮)를 말한다. 허참(許參), 또는 허참례(許參禮)와 통용하기도 한다. 새로 급제한 자는 신래(新來)라 불렀고, 처음 관직에 나오는 것을 허참이라 하였으며, 10여 일이 지나서야 겨우 선배 관원들과 더불어 같이 앉았는데 이를 면신이라 하였다. 허참예목(許參禮木)이라는 것은 허참의 예(禮)로 바치는 무명이다. 면신례 때 접대하는 수준이 지나쳐 과도한 음식 향응을 요구하거나 지나친 모욕감을 주는 경우에는 특히 면신벌례(免新罰禮)라고 하였다. 각사면신(各司免新)이란 각 관아의 신임자가 피로(披露)의 뜻으로 고참자에게 향응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문과의 경우 사관(四館), 즉 성균관·예문관·승문원·교서관에 나누어 예속시키는 것을 분관이라 하였으며, 분관한 후에 새로 예속된 자가 밤에 본관에 있는 선진(先進)의 문(門)에 가서 인사드리는 것을 회자(回刺)라고 하였다. 출입·진퇴할 때에 어떤 침학과 곤욕을 주어도 오직 선진의 명에 따라야 했으며, 거의 10여 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사(本司)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고, 신임을 면했다 하여 이를 신래면신(新來免新)이라 이름 했다. 또한 밤에 다녀도 순경(巡更)하는 자가 그의 행동을 금하지 못하였고, 복색이 극히 괴상스러워 심지어 새 귀신[新鬼]이란 조롱까지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초기에는 면신에 관하여 증거가 될 만한 자료가 없으나 율곡(栗谷)이이(李珥)에 의하면 고려말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여 급제한 자는 모두가 귀한 집 자제들로서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홍분방(紅粉榜)이라 일컬었으며 인심이 분격하여 침욕(侵辱)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1405년(태종 5) 1월 21일에 사헌부에서 감찰의 상접례를 다시 정하면서 상접과 허참은 신구대장(新舊臺長)의 상접과 출관(出官)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태종실록』 5년 1월 21일). 여기서 허참은 곧 면신과 같은 뜻으로, 이에 대한 폐단은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참례나 면신례는 조선초기부터 일종의 관행으로 행해져왔으며, 그때마다 고참들의 무리한 요구로 피해를 보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고, 이러한 폐단에 대한 지적도 더불어 제기되었다.
이 중 숙종 때 남구만(南九萬)이 지적한 면신의 폐단이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남구만은 면신례를 면신벌례라고 하여 그것이 일으키는 폐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폐단을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로 관청에 공급되는 집물의 부족을 들었는데, 이를 핑계로 면신 때 물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구만은 면신의 폐단이 가장 심한 곳으로 내금위·겸사복·우림위 등 금군삼청(禁軍三廳)을 들었다. 이 세 기관을 소위 내삼청(內三廳)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면신에 관한 폐습의 뿌리가 되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별집 제10권 「관직전고」에는 『용재총화』, 『석담일기』, 『곤륜집』, 『명곡집』등에 나오는 면신 관련 기사를 간추려 다음과 같이 면신례에 대해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 옛날에 신래, 즉 과거에 급제하여 새로 들어온 관원을 제압한 것은 호방한 선비의 예기를 꺾고 상하의 등분을 엄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규칙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성종 때에는 한갓 사관(四館)만이 아니라, 충의위·내금위 및 여러 위(衛)의 군사(軍士)와 아전·복예(僕隸)까지도 새로 들어온 사람을 침해하여, 귀한 음식물을 재촉해서 거두어들이고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비록 한 달이 지나더라도 같이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조 때에 이이가 아뢰기를, "오늘날 선비들의 처음 등과한 자를 사관에서 신래라 하며 오욕하고 침학하게 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대개 호걸의 선비는 오히려 과거도 염두에 두지 않는데, 하물며 그들로 하여금 관(冠)을 부수고 옷을 찢고 진흙 속에 굴려서 위의(威儀)를 잃게 하고 염치를 버리게 한 후에 비로소 사판에 오르게 한다면 호걸스런 선비들이 누가 즐겨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면신례와 허참례는 많은 폐단을 일으켰으므로 이를 못하도록 징책(懲責)하고 규제하였다. 1665년(현종 6) 7월 12일에는 간원이 "각조와 각사에서 면신이란 이름으로 침학하는 폐습에 대해 일찍이 본원의 계사로 인하여 금지시켰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금부 낭청 및 성균관, 승문원, 선전관, 부장, 수문장 등이 금령을 지키지 않고 다시 구습을 행한다고 합니다. 해당 관원들을 아울러 무겁게 추고하여 일체 금지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어 각 관청의 면신 폐습을 엄금하였다(『현종개수실록』 6년 7월 12일).
신래가 임명된 뒤 일정한 일수를 계산하여 사진(仕進)하게 하는 것을 계일허참(計日許參)이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소위 면신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숙종 때는 앞서 본대로 폐단에 대한 남구만의 지적이 있었고 이후 영조·정조 때도 있었다. 그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관행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내용
허참례와 면신례는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둘을 절차상 구분하여 새로 출사한 관원이 먼저 허참례를 치르고 난 다음 다시 10여 일이 지난 뒤에 면신례를 행하여 비로소 신·구 관원이 자리를 같이 하는 절차를 밟기도 한다. 삼관(三館), 즉 승문원·성균관·교서관에서는 음관(蔭官)의 수석을 상관장(上官長)이라 높여 부르고 공손히 받드는 풍속이 있었다. 과거 시험을 치른 후 방목(榜目) 발표를 경축하는 날은 반드시 삼관을 모셔와야만 잔치를 베풀고 행례를 할 수 있었다. 만약 신래가 공손하지 못하여 삼관에게 죄를 얻으면 삼관도 가지 않거니와 신은도 유가(遊街)를 다니지 못하였다.
삼관의 상관장이 처음 문에 이르면 한 사람이 북을 울리고 그의 좋은 벼슬을 소리 높이 부르는데, 여러 서리(胥吏)들이 소리를 모아 응대하고, 함께 신래를 손으로 받쳐 들었다가 내렸다 하면서 "경하합니다"하고, 또 부모 친족에게 축하하기를 "생광스럽습니다"하고, 마지막으로는 기생을 번쩍 쳐들어 경축하기를 "유모(乳母), 유모"라고 하였다.
또 신래들이 합동하여 의정부·예조·승정원·사헌부·사간원·성균관·예문관·교서관·홍문관·승문원의 각 아문에 배알하면 여러 아문의 선배들이 많은 포물(布物)을 징수하여 술을 마시고 잔치하는 비용으로 썼다. 봄에 교서관에서 먼저 행하는 것을 홍도음(紅桃飮)이라 하였고, 초여름에 예문관에서 행하는 것을 장미음(薔薇飮)이라 하였으며, 여름철에 성균관에서 행하는 것을 벽송음(碧松飮)이라 하였다.
면신연(免新宴)에 상관장은 곡좌(曲坐)하고 봉교 이하는 여러 선진들과 더불어 사이를 띄어 앉았으며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게 하였으나, 상관장만은 기생 둘을 끼게 하고 이를 좌우보처(左右補處)라고 이름 붙였다. 술자리가 시작되면 말석 관원이 왼손으로 기생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큰 술잔을 잡고는 먼저 ‘상관장님’하고 세 번 부르며, 또 가는 소리로 세 번 부르면 상관장이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하였고, 아관을 부르면 아관이 또한 큰 소리로 대답했는데, 하관이 술을 이기지 못하면 벌주가 있었지만 상관은 술을 이기지 못해도 벌주는 없었다.
비록 벼슬이 높은 대신이라 할지라도 면신연 때는 상관장의 윗자리에 앉지 못하였다. 삼관의 상관장들은 서로 자리를 띄어 앉았다. 이들이 정1품을 부를 때엔 대(大) 자를 다섯 번 붙이고, 1품에게는 대 자를 네 번 붙이며, 2품에게는 대 자를 세 번, 3품 당상관에게는 대 자를 두 번, 당하관에게는 대선생(大先生)이라고만 부르고, 4품 이하에게는 범칭하여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각기 그 성을 들어 불렀다. 부르고 난 뒤에 또 신래를 세 번 부르고, 흑신래(黑新來)를 세 번 부르는데, 흑신래란 기생을 일컫는 것이다.
신래가 사모를 거꾸로 쓰고 두 손을 등에 지고 머리를 땅에 닿도록 구부리고 선생 앞에 나가서 두 손으로 사모를 감싸 쥐고, 머리를 쳐들었다 숙였다 하는데, 이것을 예수(禮數)라고 이름 지었다. 또한 관직명을 외게 하는데, 위로부터 내리 외는 것을 순함(順銜), 밑으로부터 올려 외는 것을 역함(逆銜)이라 하였다. 또 기쁜 표정을 짓게 하는 것을 희색이라 이르고, 노여운 표정을 짓는 것을 패색(悖色)이라 했다. 별명을 말하면 그 별명대로 형용을 하도록 시켰는데, 이것을 삼천삼백(三千三百)이라 하였다. 신래들이 겪은 무수한 침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694년(숙종 20) 8월 19일에는 비변사에서 면신금단절목(免新禁斷節目)을 정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서울 각사 관원의 면신을 이른바 벌례·허참예목납물(許參禮木納物)·분축(分軸)·회자라 하는데, 관원과 하인 등이 신래라 칭하고 주식(酒食)과 잡물을 받아내고, 또한 각사의 하인 등이 면신이라 칭하며 술값 등 갖가지를 받아낸 일은 관리가 재물을 받는 경우 법을 어기지 않는다는 대명률 조목에 의거하여 장물(贓物)을 따져 처단하되 1관(貫) 이하는 장(杖) 60이고, 1백 20관에 이르면 죄는 장 1백에 유배 3천 리에 그치며, 하인 등이 저지른 일을 관원이 살피지 못하였거나 드러난 뒤에 덮어 둔 경우에는 중벌에 따라 치죄(治罪)한다.
1. 각 군문의 군관·장교·서리 이하 각종 군졸 및 지방의 번(番)에 오른 군병 가운데 면신예목을 거두었거나 인정세나 술과 음식 등 갖가지로 거둔 일이 있는 경우에는 효종 때 특별히 제정한 사목에 의하되 덮어주지만, 이를 발견하지 못한 장령은 중률(重律)에 처하고, 직접 죄를 범한 자는 군율에 의하여 처단하며, 물건을 내놓은 자는 중벌에 따라 곤장을 집행한다.
1. 지방의 각 도 각 고을에 이 폐단이 더욱 심하다. 무릇 향교·향청영리(鄕廳營吏)·역리·아전·관속 등 부류로서 금령을 범한 경우에는 각사 관원과 하인 등의 예에 의하여 치죄하고, 군문의 군관·장교 이하 군병 등으로서 금령을 범한 자는 서울 군문의 예에 의하여 처단한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경기도 화성의 해풍김씨 집안에 면시례 관련 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이 집안 선조인 김종철(金宗喆)이 1784년(정조 8)에 무과에 합격한 후 면신례를 치르라는 통보로, 좋은 술과 음식으로 선배들을 대접하라는 요구사항 등이 적혀 있다.
참고문헌
- 『용재총화(慵齋叢話)』
- 『석담일기(石潭日記)』
- 『명곡집(明谷集)』
- 『곤륜집(崑崙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