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孟思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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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60년(공민왕 9)∼1438년(세종 20) = 79세.] 고려 말~조선 전기 우왕~세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좌의정이고, 청백리(淸白吏)로 선임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세종 때에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다. 자(字)는 성지(誠之)⋅자명(自明)이고, 호(號)는 동포(東浦)⋅고불(古佛)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충청도 온양 아산(牙山) 출신으로서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 제학(提學)맹희도(孟希道)이다. 고려 최영(崔瑩) 장군의 손녀사위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세종 시대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3정승의 한 사람인데, 황희(黃喜)⋅허조(許稠)는 제도 완비에 기여하였고, 맹사성은 문화 창조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맹사성은 음률(音律)에 뛰어나서, 세종 시대 아악(雅樂)의 정리와 향악(鄕樂)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항상 검은 물소를 타고 다녔으므로, ‘기우거사(騎牛居士)’라고 일컬어졌다.

우왕 시대 활동

1386년(우왕 12) 고려 병인(丙寅) 문과(文科)에 1등으로 장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고려문과방목>] 고려 말에 춘추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전의시 승(丞)⋅기거 사인(起居舍人)을 거쳐, 사간원 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水原判官)⋅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가, 내직으로 내사 사인(舍人)이 되었다.

태조 시대 활동

1392년(태조 1) 조선이 건국되자, 맹사성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온양으로 돌아갔는데, 맹사성은 최영(崔瑩) 장군의 손녀 사위였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늙은 부모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 맹희도(孟希道)는 고려의 전교 부령(典校副令)으로 있다가, 공양왕 때에 정계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온양으로 돌아가서 오봉산(五峯山) 아래 새실마을에 살고 있었다. 맹희도는 고려 공양왕 때에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다. 맹사성은 부모를 모시고 고향 새실마을에 살면서, 조선 왕조에 벼슬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목은 이색과 가까운 유학자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조선 왕조에 협력하고, 또 조선 개국 공신 성석린(成石璘)이 그의 재주를 아껴서 조선 왕조에 벼슬하도록 권유하고, 관직에 추천하였다. 이에 1396년(태조 5) 예조 의랑(議郎)임명되었다.

정종 시대 활동

1399년(정종 1) 우간의 대부(大夫)가 되었다가, 공주목사(公州牧使)로 나가서 온양의 새실마을을 오가며 늙은 부모를 봉양(奉養)하였다.

1400년(정종 2)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가 되었다가, 문하부 낭사(郎舍)가 되었다.

태종 시대 활동

1403년(태종 3) 좌사간 대부에 임명되어, 노비의 종천(從賤) 문제를 태종의 부마(駙馬)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 태종의 맏사위)에게 누설하였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유배되었다.[『태종실록』 4년 1월 23일 1번째기사] 태종이 특별히 경외(京外: 서울 밖) 종편(從便: 죄수가 자기 편한 곳으로 귀양 가도록 명하는 것)하여 고향 충청도 온양의 새실마을로 돌아갔다. 고향 온양의 아산 고택(故宅)은 최영 장군이 맹사성의 부인 최씨(崔氏)에게 남겨준 집이었다.

1405년(태종 5) 동부대언(同副代言: 동부대언)으로 발탁되어, 태종의 최측근이 되었다가, 이조 참의(參議)로 옮겼다.

1407년(태종 7) 예문관 제학(提學)에 임명되어, 세자(世子)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모시고 명나라 북경(北京)으로 갔는데,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양녕대군을 사위로 삼으려고 선을 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맹사성은 시종관(侍從官)으로 세자를 수행하였는데, 나라에서 맹사성에게 행장(行裝: 여비)으로 쌀 60석과 상포(常布) 100필을 내려주었다.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는 양녕대군을 만나보고 혼사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은화(銀貨)와 비단을 내려주었는데, 이때 맹사성은 은화 1정과 비단 표리(表裏) 4벌을 하사받았다.[『태종실록』 8년 4월 2일 15번째기사] 영락제는 명나라 서울을 남경(南京)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기고 북경의 자금성(紫金城)을 지은 황제다.

1408년(태종 8) 한성부 부윤(府尹)에 임명되어, 세자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임하였다. 뒤이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어, 사간원과 함께 <목인해(睦仁海) 옥사(獄事)>를 다스리다가, 옥사에 연루된 태종의 부마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 조준의 아들)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는데, 대사헌맹사성과 지평(持平)박안신(朴安信)이 임금에게 보고하지 않고 부마를 잡아다가 고문하였다고 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맹사성은 한주(韓州)로, 박안신은 영덕(盈德)으로 유배되었다.

1409년(태종 9) 영의정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유배에서 풀려나서, 외방(外方)으로 종편(從便)되어, 고향 충청도 온양으로 돌아갔다.

1411년(태종 11) 다시 기용되어 충주 판목사(判牧師)로 임명되었다가, 관습도감 제조(提調)에 임명되어, 악공(樂工)들에게 음률(音律)을 가르쳤는데, 그때 예조에서 고려의 음악을 복원하기 위하여 음률(音律)에 정통한 맹사성을 관습도감 제조로 임명하도록 건의하여, 마침내 서울에 머물며 악공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1412년(태종 12) 풍해도(豐海道: 황해도) 도관찰사(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1416년(태종 16)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었다.

1417년(태종 17) 충청도 아산의 고택(故宅)에 있던 늙은 아버지 맹희도(孟希道)가 병이 나자, 판서맹사성이 아버지의 병을 구료하기 위하여 사직하니, 태종이 윤허하지 않고, 역마(驛馬)를 하사하였는데, 맹사성은 공무가 아니면 역마를 타지 않고 항상 검정 물소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어서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충청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는데, 태종이 맹사성에게 충청도 청주 감영(監營)에서 온양의 새실마을로 오가며 늙은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도록 배려하였던 것이다.

1418년(태종 18) 6월에 세자 양녕대군이 일탈(逸脫)된 행동을 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이 세자가 되었다. 이때 맹사성은 공조 판서에 임명되어, 세자 우빈객(右賓客)을 겸임하여, 새로 세자가 된 충녕대군을 가르쳤다. 그 뒤에 온양의 아버지 맹희도의 병이 위독해지자, 맹사성이 다시 사직하니, 태종이 윤허하지 않고, 역마와 약품을 하사하였다. 맹사성이 말미를 받아서 고향 온양으로 내려갔는데, 8월에 세자 충녕대군이 태종의 선위(禪位)를 받아서 즉위하여 세종이 되었다.

세종 시대 활동

1418년(세종 즉위) 맹사성은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광대[伶人]들에게 새 가사와 곡조를 가르쳐서 율조(律調)가 화합하도록 하니, 세종이 내구마(內廏馬) 1필을 하사하였다.

1419년(세종 1)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 판사(判事)가 되었고, 그해 말이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1420년(세종 2)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고, 1421년(세종 3) 의정부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다.

1422년(세종 4) 태종이 돌아가자, 국장도감 제조가 되어, 태종을 헌릉(獻陵)에 안장(安葬)하였다, 이어서 『육전(六典)』을 편찬하는 데에 참찬(參贊)허조(許稠)와 함께 제조(提調)가 되어, 나라의 제도와 법률을 개편하여 완성하였다.

1423년(세종 5) 찬성맹사성이 등창이 나서 고생을 하자, 세종이 의원을 보내고, 약을 하사하였다.

1424년(세종 6) 좌군도총제 판부사(左軍都摠制判府事)에 임명되어, 삼군(三軍) 중에 좌군(左軍)을 통솔하였다.

1425년(세종 7)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에 가서 영락제의 탄신을 축하하게 되었는데, 마침 성조(成祖) 영락제가 돌아갔다. 이에 의주(義州) 통사(通事)이성부(李成富)를 먼저 보내어 세종에게 보고하였다. 영락제가 돌아간 이후에 명나라에서는 유약한 홍희제(洪熙帝)⋅선덕제(宣德帝)가 잇달아 황제가 되었는데, 이 시대에 우리나라 세종이 우리나라와 중국과 일본의 3국 외교를 주도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돌아와서, 맹사성은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로 승진하여, 문신(文臣)이 삼군(三軍)을 통솔하게 되었다. 이것은 세종의 문치(文治) 정책에서 나온 것인데, 맹사성이 문신으로서 삼군을 통솔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1426년(세종 8) 의금부 제조가 되었다가, 1427년(세종 9)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황희(黃喜)가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맹사성이 나이가 많다고 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원하니, 세종이 이를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황희와 맹사성은 세종을 좌우에서 보필하여 10여 년 동안 세종시대 황금문화를 이룩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우의정맹사성은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감관사(監館事)로 참여하였다. 그때 『태종실록』의 편찬이 완성되자, 세종이 한번 읽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맹사성이 반대하기를, “성상께서 실록을 보고 한번 고치면, 반드시 후세의 왕들도 이를 본받게 될 것이므로, 사관(史官)들이 두려워하여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하니, 세종이 맹사성의 건의에 따라서 아버지 태종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기록한 실록을 열람하지 않았다.

1428년(세종 10) 왕세자(王世子: 문종)의 사부(師傅)에 임명되었는데, 좌의정황희가 사(師)가 되고, 우의정맹사성이 부(傅)가 되었다.

1432년(세종 14) 좌의정에 승진되었는데, 그때 황희가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세종의 이모부 노한(盧閑: 노사신의 아버지)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좌의정맹사성은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별감(別監)박연(朴堧)과 함께 「근천정(勤天庭)」 노래의 가사를 심의하였다. 또 『고려사(高麗史)』를 다시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정도전(鄭道傳)의 편찬한 『고려사』를 다시 편찬하기 시작하여, 문종 때 정인지(鄭麟趾)⋅김종서(金宗瑞)가 완성하였다.

1435년(세종 17) 맹사성은 나이가 많다고 하여 벼슬을 굳이 사양하고 물러났는데, 무관(武官) 최윤덕(崔潤德) 장군이 좌의정에 대신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세종은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러나 맹사성은 고향 충청도 온양 새실마을로 돌아가서 조용히 은거하였다.

1438년(세종 20) 10월 4일에 노병으로 고향 아산의 고택(故宅)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9세였다.[『세종실록』 20년 10월 4일 3번째기사]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그의 상여(喪輿)에 곡하였는데,[『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3] 예관(禮官)을 보내지 않고 임금이 직접 곡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또 세종은 죽은 맹사성에게 ‘문정(文貞)’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다.[『세종실록』 20년 10월 4일 3번째기사]

작품으로는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남아 있다.

맹사성의 향악(鄕樂) 정리와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맹사성은 천부적으로 음률에 밝아서 아악(雅樂: 중국 음악)과 향악(鄕樂: 우리나라 음악)을 정리하고 악기(樂器)도 손수 만들었다. 또 향악(鄕樂)을 정리하는 과정에 악곡(樂曲)에 맞추어 가사(歌辭)도 지었는데, 작품으로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남아 있다.

세종은 음악과 과학에도 정통한 임금이었다. 악기(樂器)의 음률(音律)이 계절에 따라 높낮이가 다른 점을 알고, 편경(編磬)의 경돌[磬石]을 제작할 때 남양(南陽)의 경돌을 사용하였는데, 남양의 경돌은 계절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본 소릿값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또 해주(海州)의 기장[黍]을 가지고 실험하여 소리의 기본 음가(音價)를 찾아내어 모든 악기를 제작하는 데에 적용하였다. 세종은 음악에 과학의 원리를 도입하였는데, 이 작업을 담당한 사람이 난계(蘭溪) 박연(朴堧)이다. 세종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설치하고, 박연에게 악기의 제작과 아악(雅樂)의 정리를 맡기고 좌의정황희(黃喜)와 우의정맹사성에게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당시 음악은 중국의 음악인 아악(雅樂)과 우리나라 전통음악인 속악(俗樂)으로 나누어졌는데, 향악(鄕樂)이 바로 속악을 말한다. 조선 초기 세종이 나라의 의례(儀禮)를 정하는 데에는 아악과 향악이 모두 필요하였는데, 의례(儀禮)의 절차는 반드시 음악에 따라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은 『오례의(五禮儀)』를 만들어,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의 5례의 절차를 규정하고, 그에 따른 종묘 제례음악과 궁중연회음악 등을 제정하였다. 종묘 제례음악은 세종이 손수 작곡하였고, 궁중 연회음악에 쓰는 아악(雅樂)은 박연이 정리하고, 정재(呈才: 노래하고 춤을 춤)에 쓰는 속악(俗樂)은 맹사성이 정리하였다.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논평하기를, “세종대왕은 하늘이 주신 슬기로운 분으로 기장[黍]을 해주(海州)에서 취하고, 경돌[磬石]을 남양(南陽)에서 채취하여, 조회(朝會)와 제향(祭享)과 궁중 연회에 쓰는 음악을 제정하였는데, 신라와 고려 시대 저급하고 음란한 음악을 일제히 없애버리고 우아한 우리 전통음악을 살렸다. 당시 세종대왕의 음악의 정비 작업을 보필한 신하 중에서 박연(朴堧)과 맹사성(孟思誠) 같은 사람은 모두 음악에 정통한 인물들이다.” 하였다.[『홍재전서(弘齋全書)』 권61, 잡저(雜著) 8] 또 『해동잡록(海東雜錄)』을 보면, “맹사성은 선천적으로 음률을 잘 알고 있어서 언제나 피리를 손에 들고 다녔으며, 하루에 3·4곡씩 불었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동구에 들어섰을 때, 그의 피리소리가 들리면 맹사성이 반드시 집에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3]

맹사성이 지었다는 「강호사시가」는조선 초기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기 전에 국한문(國漢文) 혼용으로 지어진 봄⋅여름⋅가을⋅겨울의 4수(首)로 읊은 연시조이다. 자연의 풍경을 읊었다고 하여 「강호가(江湖歌)」라고 부르는데, 또는 자연의 4철 변화에 한가한 정서를 읊었다고 하여 「사시 한정가(四時閑情歌)」라고도 부른다. 조선 시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읊은 시조[自然愛 時調]의 원류가 된다. 시조의 형식은 4수(首)로 구성된 연시조이고, 초장은 모두 ‘강호(江湖)’라는 말로 시작되고, 종장은 모두 ‘역군은(亦君恩)이샷다’로 끝나며, 시조의 내용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룬 세종의 은덕(恩德)을 찬양하고 있다.

<봄 노래[春詞]>

강호(江湖)에 봄이 찾아오니 깊은 흥(興)이 절로 일어난다.

막걸리를 마시며 노는 시냇가에 싱싱한 물고기가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하게 노니는 것도 역시 임금의 역군은(亦君恩)이샷다.

<여름 노래[夏詞]>

강호(江湖)에 여름이 찾아오니 초당(草堂)에 할 일이 없다.

신의가 있는 강 물결을 보내는 것이 시원한 바람이로다.

이 몸이 시원하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가을 노래[秋詞]>

강호(江湖)에 가을이 찾아오니, 물고기마다 살져 있다.

작은 배에 그물을 싣고 물결 따라 흐르게 던져 놓고,

이 몸이 소일하며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겨울 노래[冬詞]>

강호(江湖)에 겨울이 찾아오니 눈의 깊이가 한 자가 넘는다.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 도롱이를 둘러 덧옷을 삼으니,

이 몸이 춥지 않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강호사시가」의 형식과 구성을 보면, 4계절 궁중의 연회에서 정재(呈才: 노래하고 춤을 춤)할 때 광대[伶人]들이 부르던 노래 가사가 틀림없다. 한글 창제 이전에 만들어져서 궁중에서 구전(口傳)되다가, 한글이 창제된 뒤에 『청구영언』⋅『해동가요』⋅『악학습령(樂學拾零)』 등에 수록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강호사시가」의 배경은 맹사성의 고향인 충청남도 온양의 새실마을이라고 추측되는데, 「강호사시가」의 내용을 깊이 음미하면, 맹사성이 춘하추동의 네 계절에 따라 태평하고 한가한 정(情)을 느끼는 삶이 바로 세종의 은덕라고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강호사시가」는 바로 세종과 맹사성 사이의 은덕과 충정(忠情)을 읊은 시조이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청렴하고 소탈하며, 단정하고 중후하여, 의정부의 정승으로 있으면서 대체(大體)를 잘 지켰다.[『필원잡기(筆苑雜記)』 권1] 맹사성의 졸기(卒記)를 보면, “시호는 ‘문정(文貞)’이라고 하는데,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며, 예절로써 남을 대접하는 것을 ‘문(文)’이라고 하고, 청렴(淸廉)하고 결백(潔白)하며 절개와 신조를 지키는 것을 ‘정(貞)’이라고 한다. 맹사성의 사람됨이 조용하고 간편하며, 선비들을 예절로써 예우하는 것이 그의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제(階梯: 관직의 품계)가 아무리 낮은 자라고 하더라도 그를 만나보고자 하면, 맹사성은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까지 친히 나와서 집안으로 맞아들이고 상좌(上座: 윗자리)에 앉힌 다음에 이야기하였으며, 물러갈 때에도 또한 몸을 굽혀서 인사하고 두 손을 모우고 손님이 가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손님이 말에 올라앉아서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돌아서서 대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무릇 조정에서 큰일을 논의할 때나 관직에 있으면서 정무(政務)를 처리할 때에 과감하게 결단하자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고 하였다.[『세종실록』 20년 10월 4일 3번째기사]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은 맹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 집이 맹사성의 집 아래에 있었다. 맹사성은 언제나 성석린의 집을 지나가고 지나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렸는데, 성석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맹사성은 변함없이 공손한 자세로 그 집 앞을 지나다녔다.[『세종실록』 20년 10월 4일 3번째기사] 맹사성은 세종 때 정승까지 되었으나, 항상 오래된 묵은 녹미(祿米)만 먹고 살았다. 하루는 부인 최씨가 햅쌀로 지은 밥을 지어서 밥상을 차리자, 맹사성이 묻기를, “햅쌀을 어디에서 구했소.” 하니, 부인이 대답하기를, “녹미가 하도 오래 묵어서 먹을 수 없으므로, 이웃집에서 빌려 왔습니다.” 하니, 맹사성이 화를 내기를, “이미 녹미를 받았으면 그 녹미를 먹는 것이 마땅하지, 어찌 남에게서 햅쌀을 빌려 왔다는 말이요.” 하였다.[『해동야언(海東野言)』 권2] 맹사성의 사는 집이 매우 협소하고 허술하였기 때문에, 병조 판서가 나랏일을 상의하려고 맹사성의 집으로 찾아갔다가, 마침 소낙비가 내리는 바람에 집안의 곳곳에서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었다. 병조 판서가 자기 집에 돌아와서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저러한데, 내가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겠는가.” 하고, 자기 집에 짓던 바깥 행랑채를 철거해버렸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3]

맹사성이 고향 온양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의 여사[旅院]에 들렀는데, 행차를 성대하게 꾸민 어떤 젊은이가 먼저 누상(樓上)에 앉았으므로, 맹사성은 한쪽 모퉁이에 가서 앉았다. 누상에 앉아 있는 젊은이는 경상도 사람인데, 의정부 녹사(錄事)의 취재(取才: 시험하여 사람을 뽑음)에 응시하러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젊은이가 맹사성을 위층으로 불러 올려서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담을 서로 주고받다가 말끝마다 반드시 ‘공’ ‘당’이라는 말을 붙이게 되었다. 맹사성이 먼저 묻기를,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 가는공.” 하니, 젊은이가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맹사성이 묻기를, “무슨 벼슬인공.” 하니, 젊은이가 “녹사 취재란당.” 하였다. 맹사성이, “내가 한번 시켜주겠는공.” 하니, 젊은이가, “에이, 그렇게 하지 못할 거당.” 하였다. 그 뒤에 취재하는 날 맹사성이 고시장에 앉아 있는데, 그 젊은이가 고시장에 들어와서 고시관들 앞에 섰다. 맹사성이 묻기를, “시험은 어떠한공.”하니, 그 젊은이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소리치기를, “아이고, 죽었지당”하니, 그 자리에 있던 고시관들이 모두 놀라서 이상하게 여겼다. 맹사성이 그 사연을 말하니, 모든 고시관 재상들이 크게 웃었다. 마침내 그 젊은이는 합격하여 의정부 녹사가 되었는데, 그 젊은이는 맹사성의 추천을 받아서 여러 차례 고을 원을 지냈다. 후세 사람들은 이 일화를 ‘공당 문답’이라고 일컫는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3]

맹사성은 말을 타지 않고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으므로, 스스로 호(號)를 ‘기우거사(騎牛居士: 소를 타고 다니는 선비)’라고 일컬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말하기를, “맹사성은 특히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는데, 고향 온양으로 다닐 적에 공무(公務)가 아니라고 하여 나라의 역마(驛馬)를 타지 않고 항상 ‘검정 물소’를 타고 다녔다.”고 하였다.[『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7] 맹사성이 타고 다닌 소는 누른 황소가 아니고 검정 물소였다고 한다. 맹사성은 고향 온양에 근친(覲親)하러 갈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려서 역마를 이용하지 않고 항상 간소하게 행장을 차려서 검정 물소를 타고 다녔다. 경기도 안성양성현감(陽城縣監)과 경기도 평택진위현령(振威縣令)이 정승맹사성이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경기도 이천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는데, 두 사람의 수령관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허름한 늙은이가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의 수령관이 하인들을 시켜서 소를 탄 늙은이를 불러서 꾸짖게 하였는데, 맹사성이 하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고불(古佛)은 맹사성의 호(號)이다. 하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니, 두 사람의 수령관이 깜짝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아래에 있는 깊은 연못에 관인(官印)을 떨어뜨려버렸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 연못을 인침연(印沈淵: 관인을 빠뜨린 연못)이라 부른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3]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7의 고불산(古佛山) 기슭에 있는데, 경기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덤의 모양이 장방형인 것이 특색이고, 좌우에 문인석이 있다. 그 무덤에서 오른쪽으로 500m 지점에 <흑기총(黑麒塚)>이 있는데, 평소 맹사성이 즐겨 타고 다니던 ‘검정 물소의 무덤’이다.

부인 철원최씨(鐵原崔氏)는 고려 최영(崔瑩) 장군의 손녀딸인데, 무덤은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새실마을 <맹사성 고택(故宅)>의 뒷산 설화산 기슭의 ‘신창맹씨(新昌孟氏) 선영(先塋)’에 있다. 외아들 맹귀미(孟歸美)는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는데, 아버지 맹사성보다 먼저 죽었다. 손자가 둘이 있는데, 맏손자는 맹효증(孟孝曾)이고, 둘째손자는 직장(直長)맹계증(孟季曾)이다.[『세종실록』 20년 10월 4일 3번째기사]

<맹사성 고택(故宅)>은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있는데, 고려 최영 장군이 살던 집이다. 고택의 뜰에는 세종 때 맹사성과 황희⋅허조 3정승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600여년 수령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조선 시대 아산의 유림(儒林)들이 그 은행나무 아래에 자주 모여서 강학(講學)하였으므로, 이곳을 <아산맹씨 행단(杏壇)>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사적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택 뒤에 설화산 기슭에는 맹사성의 부인 최씨(崔氏)와 부친 맹희도(孟希道)와 조부 맹유(孟裕)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에 세 분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世德祠)가 있으며, 전시관에는 맹사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 전시된 조선 초기 옥피리⋅옥비녀 등 맹사성 부부가 쓰던 유물은 중요 민속자료 제225호로 등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강한집(江漢集)』
  • 『경재유고(敬齋遺稿)』
  • 『경재집(敬齋集)』
  •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언(記言)』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대동기문(大東奇聞)』
  • 『도곡집(陶谷集)』
  • 『독곡집(獨谷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문선(東文選)』 『동사강목(東史綱目)』
  • 『목은고(牧隱藁)』 『목은집(牧隱集)』
  • 『삼명시집(三溟詩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호전집(星湖全集)』 『송당집(松堂集)』 『송암집(松巖集)』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촌집(陽村集)』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용재총화(慵齋叢話)』 『이재유고(頤齋遺藁)』
  • 『인재집(寅齋集)』 『임하필기(林下筆記)』 『잠곡유고(潛谷遺稿)』 『점필재집(佔畢齋集)』 『정암집(正菴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지호집(芝湖集)』 『직암집(直菴集)』 『청대집(淸臺集)』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청파극담(靑坡劇談)』 『춘정집(春亭集)』 『필원잡기(筆苑雜記)』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해동야언(海東野言)』 『해동잡록(海東雜錄)』 『허백당집(虛白堂集)』 『형재시집(亨齋詩集)』 『호정집(浩亭集)』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