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황제(萬曆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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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13대 황제.

개설

1563년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주익균(朱翊鈞)이다. 1572년 10세의 나이로 황제에 등극해 1620년 사망할 때까지 48년 동안 명을 통치하였다. 장거정(張居正)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교육을 받았던 기간에는 개혁 정책과 함께 내정과 외적의 위협 등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하지만 장거정이 죽은 후 만력제의 태도는 변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명의 황제들 중 가장 길었으며, 중국 역사 전체에서도 다섯 번째로 길었다. 하지만 길었던 재위 기간에 비해 남긴 업적은 많지 않으며, 재정의 낭비와 후계자 문제에 따른 혼란 등으로 인해 내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특히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 즉 세 번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 명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가계

만력제는 목종 융경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융경제는 슬하에 네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다. 장남과 둘째 아들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주익균이 1568년 태자로 임명되었다. 그의 모친은 이위(李偉)의 딸로 순천부(順天府) 돈현(潡縣) 출신이다. 그녀는 출신이 비천했지만 유왕부(裕王府)의 궁인으로 간택되어 만력제 등을 출산했다. 목종이 황제에 등극할 때 귀비(貴妃)로 책봉되었다.

휘하에 7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이 광종(光宗)태창제(泰昌帝)였다. 그러나 태창제는 즉위 후 한 달 만에 사망했다. 이후 만력제의 손자 희종(熹宗)천계제(天啓帝)가 즉위했다.

활동 사항

만력제는 어렸을 때 효성이 깊고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즉위 초창기에는 성품이 영명하여 중요한 업무들을 직접 결단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융경제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명 조정과 백성들의 만력제에 대한 기대 또한 컸다.

장거정은 어린 만력제에게서 성군(聖君)의 자질을 발견하고 그를 이상적 황제로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장거정은 어린 황제의 교육을 위해 조회(朝會)와 강습(講習)의 일정표를 직접 제작했다. 일정표에 따르면 만력제는 10일 중 3일, 6일, 9일에 각각 조회를 열어야 했다. 나머지 날에는 강습을 해야만 했다. 즉, 10일 중 3일은 조회를 하고, 7일은 강습을 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당시 만력제는 장거정이 제시한 일정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장거정은 만력제에 대한 기대가 워낙 컸기 때문에 스승으로서 그를 엄격하게 대했다. 간혹 강습 중 만력제의 실수를 너무 엄격하게 지적하거나 질책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만력제가 서법(書法)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서법을 자랑하게 되자 장거정은 황제의 교육과정에서 서법을 제외했다. 하지만 만력제는 장거정의 엄격한 교육 방식에 지치기 시작했다.

처음 만력제는 장거정을 수보(首輔)로 임명했다. 사실상 장거정에게 정권을 위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거정은 만력제에게 부여받은 강력한 권한을 바탕으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게다가 만력제의 모친이었던 자성황태후(慈聖皇太后)와 총신이었던 환관 풍보(馮保)까지 장거정을 지원했다. 명 조정의 신료들은 장거정의 정책에 반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당시 명은 정치·사회·경제 모든 분야에 걸쳐서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다. 정치는 부패했고 관료의 기강은 이완되었다. 상품경제의 발전으로 인구는 명 초기에 비해 두 배 정도 증가했지만 빈부의 격차도 함께 증가하고 있었다. 서북 지역의 몽골은 변경 지역을 지속적으로 침입해 왔고, 동북 지역의 여진 세력도 명의 영향력과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왜구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명 사회에 남긴 깊은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명은 강력한 개혁을 통해 이와 같은 위기를 돌파할 필요가 있었다. 장거정은 우선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관료들의 복무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우선 정부 비판의 근원이 되었던 감찰기관과 지방의 서원들을 통제했다. 그리고 법과 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범법자는 반드시 처벌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또한 능력 본위의 관료선발 체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척계광(戚繼光)과 이성량(李成梁) 같은 유능한 장수를 등용하면서 변방의 방어체제를 강화했다. 무엇보다 장거정의 개혁 정책을 통해 국가 재정이 크게 안정되었다.

하지만 장거정이 죽은 후 그가 추진했던 모든 정책은 후퇴하게 되었다. 만력제는 장거정을 강력하게 지원하면서 그의 개혁 정책이 커다란 성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장거정이 죽게 되자 만력제의 태도는 돌변했다. 장거정의 개혁 정책을 가장 앞장서서 후퇴시킨 장본인이 바로 만력제였다.

만력제는 장거정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최고의 예우로 대했다. 그렇지만 1년 뒤에 자신이 장거정에게 하사했던 봉호와 시호를 모두 철회했다. 다음 해에는 장거정 가족의 재산을 몰수하고 장남을 자살하도록 몰아갔다. 아울러 풍보의 관직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만력제는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었던 장거정과 풍보의 영향력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워졌다.

만력제는 황제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두문불출했다. 조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물론 심지어는 대신들의 접견 자체를 거부했다. 만력제가 오랜만에 조정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유는 황태자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만력제와 대신들의 대면은 25년 만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재물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국가 재정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일단 만력제는 몰수했던 장거정과 풍보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태감들을 전국에 파견해 세금을 걷도록 조치했다.

만력제는 공적인 업무에 대한 재정 지출을 가급적 제한하면서 황제 자신의 유흥을 위한 비용은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는 관리의 결원이 생겨도 이를 충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능묘를 건설하기 위해 8백만 냥에 달하는 엄청난 재정 지출을 단행했다. 그는 장거정이 만들었던 흑자 재정을 가족의 사치를 위해 사용했다.

그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개인의 유흥 등을 위해 재정을 낭비하는 동안 영하지역(寧夏之役)·양응룡(楊應龍)의 난·임진왜란의 만력삼대정이 발생하게 되었다. 명에서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했다. 이를 통해 명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명은 만력삼대정에 쓰인 군사비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후 국가 재정이 만성적 적자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만력제의 결단으로 파견되었던 명군은 임진왜란 당시 수세에 몰렸던 조선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 만력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보고받은 정보를 통해 조선과 일본의 연루를 의심했다. 하지만 병부(兵部) 상서(尙書) 석성(石星) 등의 의견에 따라 조선으로의 출병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요동군을 선봉으로 파견했고, 이후 이여송(李如松) 등에게 대군을 인솔하고 조선으로 출병하도록 조치했다(『선조실록』 25년 12월 1일). 비록 조선만을 위한 조치라기보다는 명의 요동 지역 등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지만 명군의 출병은 조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울러 조선과 명, 일본이 함께 개입된 국제전을 수행하면서 소비되었던 막대한 비용은 명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후 명 조정은 황태자 책봉 문제로 복잡한 정국이 조성되었다. 만력제는 장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총애하던 정귀비(鄭貴妃) 소생의 셋째 아들 주상순(朱常洵)을 황태자로 책봉하고자 했다. 이 문제로 약 8년 동안 황제와 대신들 사이에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다. 이 문제는 결국 1601년(명 만력 29) 장남 주상락이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정귀비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황태자 책봉 문제 때문에 명 조정의 국론은 분열되었고, 당파 간의 분쟁 역시 격화되었다. 만력제는 1620년에 사망하였다(『광해군일기』 12년 10월 9일).

만력제의 사망 이후 태창제, 천계제, 숭정제(崇禎帝)가 차례로 즉위했지만 국면을 전환시킬 수는 없었다. 태창제는 불과 한 달 만에 사망해 명의 정국은 더욱 복잡해졌다. 천계제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재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정사를 맡기고, 자신은 향락에 빠졌다. 명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는 이 국면을 전환하고자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명의 패망은 만력제의 재위기를 통해 본격화되었던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의 길었던 재위 기간은 명의 멸망에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조선은 1704년 창덕궁 금원에 임진왜란 때의 구원에 감사한다는 의미의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만력제의 제사를 지냈다(『숙종실록』 30년 12월 21일).

참고문헌

  • 『만력삼대정고(萬曆三大征考)』
  • 『명사(明史)』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명통감(明通鑑)』
  • 『장문충공전집(張文忠公全集)』
  • 김문기, 「명조의 가을, 만력제와 장거정」, 『동아시아사의 인물과 라이벌 -조동원교수정년기념논총』, 아세아문화사, 2008.
  • 久芳崇, 「16世紀末, 日本式鐵砲の明朝への傳播-萬曆朝鮮の役から播州楊應龍の亂へ」, 『東洋學報』84-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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