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삼비(馬三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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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누르하치를 도와 조선·명과 교섭을 벌인 인물.

개설

마삼비의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다. 『선조실록』과 『명신종실록』의 기사 비교를 통해 그가 마합탑길(馬哈塔吉) 등과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마삼비는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가 건주여진을 통일하던 시점에 그를 대신하여 명과 교섭을 벌였고, 그의 아들 마신(馬臣)은 조선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에는 마합탑길(馬哈塔吉)·마합합길(馬哈哈吉) 등으로 나타났다.

가계

가계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마신(馬臣)이라는 아들이 있었음이 확인된다(『선조실록』 28년 12월 5일).

활동 사항

마삼비는 1589년 누르하치의 공로를 명에 상주하여 그가 도독(都督)의 관직을 받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건주좌위를 대표하여 수차례 명에 조공 사절로 파견되었음이 확인된다. 마삼비는 1590년·1592년·1595년·1602년에 건주좌위의 도독 도지휘(都督都指揮) 혹은 도독 지휘(都督指揮), 도독(都督) 등의 직함으로 북경을 방문하였으며 대부분 100여 명의 여진인을 대동하였다. 조선에서는 마삼비가 누르하치의 차장(次將)이라고 표현하였다(『선조실록』 29년 4월 13일).

1592년 9월 조선은 명의 요동도사(遼東都事)로부터 건주여진의 군사 요청 제의에 대한 병부의 자문을 전달받았다. 이에 따르면 조공을 목적으로 북경에 체류하던 마삼비가 임진왜란의 소식을 들은 뒤, ‘조선과의 경계가 연접해 있다.’는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돕겠다고 제안하였다. 특히 그는 자신이 조공에서 돌아가 누르하치를 설득하겠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마삼비가 명과 건주여진의 교섭을 담당하였던 주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선조실록』 25년 9월 17일).

모서징(茅瑞徵)과 팽손이(彭孫貽)는 이 사건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마삼비는 조공하러 온 상황에서 건주여진은 조선과 땅을 맞대고 있는데 누르하치는 충의로우며 활시위를 당길 수만 명을 모을 수 있으니, 왜를 정벌하여 보답하고 싶다고 말하였으나, 이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삼비는 조선에 대한 파병을 자청함으로써 자신이 섬기는 누르하치의 충의를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며, 이는 당시 명과의 교역에 대한 주도권을 다투는 여진 내부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595년 7월 조선은 건주여진 사이에 월경과 관련한 분쟁이 발생하자, 명의 유격호대수(胡大受)에게 사건의 중재를 요청하였고, 호대수는 수하 여희원(余希元)을 평안도 만포진(滿浦鎭)으로 보내어 교섭을 진행하게 하였다. 이때 마삼비는 중국에 조공하기 위하여 북경에 가 있었고, 마삼비의 아들 마신이 교섭을 담당하였다(『선조실록』 28년 12월 5일). 조선은 이 시점에 신충일을 파견하여 건주여진을 정탐하고 또 변경 문제에 대한 교섭을 담당하게 하였고, 여희원이 직접 건주여진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596년 2월 13일 마삼비는 귀환하는 여희원과 함께 만포진에 이르러 피로인의 일부를 송환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이 답례로 베푸는 잔치의 일정을 조율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4월 10일). 마삼비는 건주여진을 대표하여 조선이나 명과의 교섭을 담당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동이고략(東夷考略)』
  • 『산중견문록(山中見聞錄)』
  • 장정수, 「16세기 말~17세기 초 조선과 건주여진의 배후 교섭과 신충일의 역할」, 『한국인물사연구』 25,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