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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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에 용산에 사는 말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의 공적인 수송에 응하기 위하여 만든 계.

개설

조선후기에는 국가에서 한강 주변의 공적인 수송을 위하여 말을 모아 역을 제공하게 하고 주변의 주민들에게 세를 거두어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공적으로 수납(輸納)할 것이 있으면 한강 연안에 사는 부민(富民)들이 말을 모아서 계(稧)를 만들어 이에 대한 역을 담당[支應]하였는데, 이를 마계(馬契)라고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원래 정부 공용 물자를 운반하는 태운역(駄運役)은 조선초기부터 정식화된 방역(坊役)으로 한성부의 공방(工房)이 이를 관장하였다. 각 아문에서 운반할 물건이 있을 경우 한성부에 공문을 보내면, 한성부에서 태가(駄價), 즉 운반비를 정한 후에 해당 부(部)에 지시하여 방민(坊民)을 정하고 이를 거행하였다. 처음에는 도성 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방민에게 부과되었는데, 17세기 이후에는 점차 강가에 거주하는 방민에게만 부과되었다.

조직 및 역할

마계는 크고 작은 국역(國役)에서 태운역을 담당하는 공인계(貢人契)로 창설되었다. 마계는 세곡 하역과 창고에의 납부를 담당하였던 모민계(募民契)와는 달리 정부의 공용 물자를 운송하여 운반비를 정식으로 호조(戶曹)에서 지급 받는 별무공인계(別貿貢人契)로 성립하였다. 그러나 마계 운영권을 장악한 권력과 유착된 자들은 비변사로부터 유리한 규정을 마련하고 한성부와 결탁하여 마계 재정의 안정화 방안을 마련하였다. 즉 강변 주민 가운데 역을 담당해야 하는 응역호(應役戶) 1호(戶)당 돈 3냥씩을 징수하여 그 노역을 보상 받는 방식에서 역(役)의 유무를 떠나 총 호수를 계산하여 돈을 거두는 규정을 마련하였다. 이에 방민들이 무리를 불러 모아 계인(契人)의 집에서 난동을 일으켰고 군문(軍門)에 예속된 자들도 이에 참여하였다. 이른바 경강민의 마계 습격 사건이다(『영조실록』 11년 윤4월 15일).

변천

마계는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운부계(運負契)와 통합되어 세마운부계(貰馬運負契)가 되었다.

참고문헌

  • 고동환, 『조선 후기 서울 상업 발달사 연구』, 지식산업사, 1998.
  • 김동철, 「18세기 방역제(坊役制)의 변동과 마계의 성립 및 도고화(都賈化) 양상」, 『한국문화연구』1,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