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건충(馬建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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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 양무운동을 추진하였던 관료이자 외교관.

개설

마건충은 청말 가톨릭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이후 이홍장의 휘하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시 조선에 파견되어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 또 조선에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출병하는 청군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와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였다. 이홍장이 전개한 양무운동에서 실무 관료로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였다.

가계

마건충은 청말 천주교 가정에서 마악능의 아들로 태어났다. 둘째 형인 마건훈은 이홍장의 막료로 회군의 병량대를 담당하였고, 넷째 형인 마상백은 진단대학(震旦大學)과 복단대학(復旦大學)을 설립한 교육자였다.

활동 사항

마건충은 유년기에는 과거 급제를 목표로 사서오경을 교육받았다. 1853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그의 가족들은 상해(上海)로 이주하였다. 상해에서 마건충과 그의 형제들은 예수회가 설립한 서회공학(徐匯公學)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라틴어·그리스어 등을 교육받았다. 1870년, 둘째 형 마건훈의 소개로 이홍장의 막료가 되었다. 1876년에 낭중의 자격으로 이홍장에 의하여 국비유학생으로 발탁되어 프랑스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동시에 프랑스 주재 청국공사곽숭도(郭嵩燾)의 통역이 되었다. 이후 파리 정치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880년 귀국한 이래 이홍장이 주도하였던 양무운동의 실무 관료로 활동하였다. 이듬해인 1881년에는 아편 전매와 세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도에 파견되었다. 마건충은 조선 정부에 미국 등 서구 각국과 수교 통상할 것을 촉구하려는 이홍장의 뜻에 따라 「대의조선여각국통상약장절략(代擬朝鮮與各國通商約章節略)」을 작성하였다. 이는 조약 체결의 원칙과 방법, 개항장, 거류지, 수출입 관세, 외교 대표, 외국 교민, 조약의 인준과 발효, 조약문에 사용할 용어 등 앞으로 조선이 서양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게 될 경우 참고할 수 있는 사항을 담은 것이었다.

1882년에 마건충은 이홍장의 명으로 정여창(丁汝昌), 미국 슈펠트(Shufeldt, R.W.)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어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고종실록』 19년 3월 15일). 같은 해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오장경(吳長慶)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군란의 지도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하고, 청으로 납치하였다(『고종실록』 19년 7월 13일).

1884년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에 들어갔으며, 1890년에 대외무역 발전과 민간산업의 진흥을 주장한 『부민설(富民說)』을 저술하였다. 이후 상해 기기직포국(上海機器職布局) 총재에 임명되었으나 경영난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895년 청일전쟁이 종결되면서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이홍장의 부름을 받고 그를 도와 조약 체결을 완료하였다. 1900년 사망했다.

저술로는 1896년 양계초(梁啓超)와 공저한 『적가재기언기행(適可齋記言記行)』, 1898년 중국인에 의하여 저술된 최초의 중국의 문법서인 『마씨문통(馬氏文通)』 등이 있었다.

학문과 사상

마건충은 서양과 같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으며, 이를 위하여 근대적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개량주의 사상가였다. 또 중국의 고문(古文)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서양과 같은 문법서가 필요하다고 여겨 1898년 중국인 최초로 중국어 문법서인 『마씨문통』을 저술하여, 간행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적가재기언기행(適可齋記言記行)』, 『마씨문통(馬氏文通)』, 『감려순기(勘旅順記)』

참고문헌

  • 구선희, 『한국 근대 대청정책사 연구』, 혜안, 1999.
  • 권혁수, 『19세기 말 한중 관계사 연구』, 백산자료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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