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감(屯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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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전감관의 약칭으로, 둔전의 관리와 경영을 담당한 직임.

개설

둔감은 둔전의 실질적인 경영과 지대 수취를 담당하는 직임이었다. 양반층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임명되었다. 둔감은 둔전 관리를 통해 적지 않은 경제적 이득을 차지하였으며, 이 때문에 정치권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둔감의 직임은 매매의 대상이었다. 이들의 일부는 둔전의 권리에 대한 일정 지분을 가지고 경영의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기까지 하였다.

담당 직무 및 변천

둔감은 둔전 경영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파종에서 추수까지 전 과정을 관할·감독함은 물론 지대를 수취하여 소속 기관에 납부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들은 감관, 둔전별장, 둔전관)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었고, 경우에 따라 동일한 직임을 달리 부르기도 하였다. 대체로 군사적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경우 별장(別將)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는 감관으로 지칭되는 것이 통례였다.

둔감의 밑에는 실무를 맡아 볼 마름이나 둔장(屯長) 등이 배치되었다. 군문·아문은 둔전으로부터 지대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실무 책임자인 둔감의 임명에 주의를 기울였다. 주로 둔전 소재 거주자와 서울 사람이 주로 맡았다. 이는 둔전 절수 대상지를 물색하기 위해서는 현지 사정에 밝아야 했고, 개간 등에 투입되는 물력을 대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감관은 대체로 경제력을 갖춘 부민(富民)으로서 서울의 유력층과도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1704년(숙종 30) 사간최계옹(崔啓翁)은 당시 영의정신완(申琓)이 태안·당진 일대의 목장 둔전을 장악하고 둔감의 임명을 좌지우지하였으며, 둔곡(屯穀) 관리권도 자신의 첩 소생들에게 맡겨서 사복시의 재정을 고갈시켰다고 비판하였다(『숙종실록』 30년 11월 17일). 이 사안은 왕 숙종이 신완을 옹호함으로써 진위를 가리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당시 둔전 운영과 관련된 각종 이권이 정치권과 연관되었을 개연성을 보여 주었다.

둔감은 둔전의 확보나 개간 과정에 물질적인 형태의 기여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로 인해 둔전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군·아문의 명목적 소유 이외에 둔감의 토지에 대한 권리가 중첩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들 둔감은 자신의 권리를 바탕으로 둔전 경영의 주도적인 위치까지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중답주(中畓主) 등으로 나타나면서 둔전의 소유권에 일정한 지분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둔전의 경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마련이었다. 이는 둔감의 직임이 경제적 권리로 매매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이 되었다.

둔감은 둔전의 관리·수취와 관련하여 경제적 이익 확보에 몰두하였고 이 때문에 이들의 모리 행위는 종종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둔감 직임으로 얻을 수 있는 이권이 막대했던 만큼 그 직임을 따내려는 사람들은 집요하게 노력하였다. 이로써 둔감의 직임은 일종의 권리로서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경종대 신임옥사(辛壬獄事)에 연루된 이태화(李泰華)라는 자가 호조의 둔전별장첩(屯田別將帖)을 위조하여 철원 땅에 함부로 팔았다가 발각되어 형문(刑問)을 받고 있는 예(『경종실록』 2년 8월 5일)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둔감의 파견은 각 군문과 아문이 독자적으로 토지 재원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둔감의 파견과 이로부터 불거진 문제점은 이 시기 국가 재정이 중앙의 통제하에 일관되게 운영되지 못하고 각급 기관에 의해 자의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정부의 둔전에 대한 시책도 둔감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참고문헌

  •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 연구』, 경인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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