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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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선조 40)부터 1678년(숙종 4)까지 부산 두모포에 있었던 왜관.

개설

1607년(선조 40)에 조선은 일본의 계속적인 국교 재개 요구에 응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에 회답하고 붙잡혀 간 조선인들을 찾아온다는 이름으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보냈다. 이로부터 1609년(광해군 1)에 기유약조(己酉約條)가 맺어져서 무역도 재개되었다.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은 조선이 회답사 파견을 결정하고 국교 재개에 따르는 후속 절차를 논의하기 위하여 일본 사자가 머물 숙소로서 지은 것으로 1607년(선조 40)부터 1678년(숙종 4)까지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두모포왜관이 세워진 것은 조·일 간에 국교 재개 교섭이 마무리된 시점에서 일본 사자를 응대하기 위한 관소를 급히 만들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1606년(선조 39) 9월 조선에서는 왕릉을 파헤친 왜인을 붙잡아 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를 먼저 보내와야 한다는 두 가지 사항을 다치바나 도시마사[橘智正]가 가지고 나올 터인데 두 가지 조건이 성실하다면 회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때는 부사과 전계신(全繼信), 역관 박대근(朴大根)·이언서(李彦瑞) 일행이 대마도로 건너가서 일본의 진의를 탐색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으로 보낼 일본의 국서를 미리 보고 조선의 의도를 명확히 해 둔 시점이었다. 이미 회답사 파견을 위한 예단을 준비하고 있었고, 머지않아 도해할 쓰시마[對馬] 도주의 가신 다치바나가 절영도(絶影島) 왜관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이므로 새로운 관소, 즉 왜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선조실록』 39년 9월 17일).

두모포왜관은 회답사여우길(呂祐吉) 일행이 일본 사행 결과를 보고하고 부산에 내려온 1607년(선조 40) 2월에도 공사에 들어가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회답부사경섬(慶暹)의 사행록에 정사·접위관과 함께 배를 타고 절영도 왜관 앞을 지나다가 배 위에서 다치바나를 만났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후 회답사가 1607년(선조 40) 7월 초에 조선 사신을 호송하였던 다치바나가 절영도에 갔을 때 관소가 없어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는 두모포왜관 공사가 진행 중이었거나 예정된 시점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두모포왜관의 규모는 기유약조가 체결된 지 2년 만에, 세견선 도해가 다가온 시점에 보고되었다. 왜관의 전면인 동쪽은 바다이고, 남·서·북 세 방향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왜인들은 급히 지어진 서관을 기피하고, 동관에서 거처하려고 하였다.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연향청과·척량청(尺量廳)이라 하여 왜관에 도착한 일본 선박의 크기를 측량하는 시설도 있었다. 남풍을 바로 맞받는 곳에 수책이 설치되어 있어 배를 간수하기 좋지 않아 왜인들은 담을 동관의 동쪽으로 미루어 짓고 수책을 옮겨서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는 임진왜란 이전에 부산진성에 같이 있었던 경상좌수영을 왜관이 가까운 곳에 지으면서 군사상의 비밀 누설 때문에 이전 문제가 대두한 상태였다. 여기에 급히 지어진 왜관의 수책 이전을 요구받자 조선 정부는 왜관을 국교 재개 교섭을 했던 절영도로 이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왜관 측은 부산진첨사영을 옮기지 않는다면 자신들도 이전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에 약간의 시간차는 있으나 부산첨사영은 임진왜란 이전 위치보다 동쪽으로 5리 떨어진 자성대(子城臺)로 옮기고, 좌수영은 동래부 관아에서 10리 떨어진 해운포(海雲浦) 옛터로 이전하였다.

조직 및 역할

두모포왜관은 임진왜란 이전의 부산포왜관의 규모에 견주어서 건립하기는 하였으나, 전란 이후 극심한 재정 궁핍 상태에서 몇 달 만에 조성한 것이었다. 두모포왜관에서는 1622년(광해군 14)과 1623년(광해군 15)에 큰 화재가 있었다. 이후 1626년(인조 4)에는 만송원(萬松院) 송사로 도해한 왜인이 불을 내어 동관 대청과 주방이 다 타 버렸는데, 경상도에서 목재·기와 역군을 징발하여 복구하였다. 1632년(인조 10)에는 쓰시마 번에서 왜관의 담을 물려 쌓고 우물을 파 줄 것을 요청하였다. 1635년(인조 13)에도 왜인들이 지은 가건물 20여 칸에 화재가 발생하자 조선 정부에 각 포에서 개수할 재목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예에서 왜관 건물을 보수·개축하는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였는지는 제대로 알기 어렵지만 관례적인 규칙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연대기 자료에 왜관 체류 인원이 실려 있으며, 1619년(광해군 11) 경상도감영에 보고된 계본에는 동래부사가 체류한 왜인의 수를 성책하여 비변사로 보고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광해군대에는 체류 인원이 500~600명대였고 1,0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쓰시마 번은 국교 개찬 사건 심판 이후 1637년(인조 15)부터 막부를 의식하여 대조선 외교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의도가 선창 시설이 좋지 않고 터가 좁으며 부산진 민가와 차단되지 못한 두모포왜관의 시설 개량 요구에도 나타났다. 1640년(인조 18)에는 쓰시마 번 차왜가 재목을 싣고 와서 왜관 건물을 수리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터에 견주어 많은 인원이 거주하면서 지은 집들이 늘어나면서 정비할 필요성이 있었다. 체류 기한을 넘기고 머물거나 여러 가지 명목으로 더 머문 인원이 많아진 것이었다.

당초 조선식으로 지어진 건물 사이에 일본인들이 지은 집이 들어섰고, 화재 복구 후 들어선 집은 체류 중인 일본인의 취향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1640년(인조 18) 4월에 이뤄진 왜관 수리는 처음으로 쓰시마 번에서 비용을 내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파장으로 수리·보수를 감독하는 목적으로 1645년(인조 23)에 감동역관(監董譯官)의 제도를 처음 만들었다. 감동역관은 왜학역관 중에서 임명하였으며, 주어진 비용 내에서 공사 감독을 담당하면서 양측 간의 사항을 중개하는 임무를 맡았다.

변천

쓰시마 번은 1640년(인조 18) 두모포왜관을 자신들의 비용으로 정비·개선하면서 한편으로는 왜관 이전을 요구하였다. 1646~1647년(인조 24~25)에 있었던 왜관 공사에서는 조선이 물자와 인원을 들이기는 하였지만 감동역관최의길(崔義吉)이 최대한 자재를 아끼고 인부를 줄이려고 할 뿐, 쓰시마 번 공사 인원들은 식사도 신통하지 않고 공사 기일이 늦어진다고 불평하였다. 결국 1647년(인조 25)에 서관 공사만 끝내고 쓰시마 번 인원은 철수하였고, 동관 공사도 기일을 늦추어 진행하라는 감동역관의 말도 듣지 않았다. 드세게 왜관 개량을 밀어붙였던 쓰시마번의 태도는 1650년(효종 1) 청 사문 이후 사그라졌다.

1659년(효종 10) 3월에 쓰시마 번에서는 차왜 평지우(平智友)를 보내서 도주 소요시나리[宗義成]의 부음을 전하고 왜관을 부산성으로 이전해 줄 것을 다시 요구하였다. 2년 뒤에 새 도주 소요시자네[宗義眞]도 차왜를 보내 왜관 이전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웅천(熊川)으로 이전하는 것은 내륙이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답변하였다. 1663년(현종 4) 가을에 가서야 조선 정부는 차왜가 요구한 구 선창을 수축하고 담장을 퇴축하는 것을 수용하여 공사에 들어갔다.

1668년(현종 9)에 나온 차왜는 전술을 바꿔서 부산성이 아니라 임진왜란 이전에 제포왜관(薺浦倭館)이 위치하였던 웅천으로 이전을 요구하였다. 2년 뒤인 1670년(현종 11) 4월에 조정에서 논의하기를 영의정정태화(鄭太和)는 웅천이 아닌 다른 곳을 허락해야 한다고 하였고, 대장이완(李浣)은 절대 불가하다고 하였다. 1671년(현종 12)에 도해한 평성태(平成太)는 왜관 이전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정해진 접대를 받지 않고 두모포왜관을 벗어나서 동래부로 갔다가 병사하였다. 이듬해인 1672년(현종 13)에 나온 차왜는 낙동강 서쪽은 조선이 반대하므로 동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1674년(현종 15)에 조선은 낙동강 동쪽의 다대포(多大浦)·초량(草梁)·절영도 목장 중 선택할 것을 제시하였고, 1675년(숙종 1) 10월에 조선은 웅천은 절대 허락할 수 없지만 초량은 무방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왜관 이전 과정은 1929년에 경성제대 교수 오다 쇼고[小田省吾]의 연구에서 정밀하게 밝혀졌고, 후속 연구에서도 대체로 그의 견해가 유지된 채로 보충되었다. 원사료에는 쓰시마 번이 왜관 이전 협상을 30~40년 동안 매달려 성공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오다 쇼고 또한 그러한 사료에 충실한 논증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왜관 이전 과정에서 조선 정부가 취한 교린 논리는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조선이 17세기 중반에 일본의 금수품(禁輸品)인 유황과 군사 무기를 쓰시마 번의 협조로 사들여 왔으며, 쓰시마 사신이 조선에서 받아 갈 목면이 적체된 사정을 타개하기 위하여 공작미 협상을 요구하였을 때 연한을 계속적으로 늘려 준 점은 간과되었다. 자료에 나오는 30~40년의 기록에는 이러한 양국 관계의 내밀한 사항이 빠져 있었다.

참고문헌

  • 『계본등록(啓本謄錄)』(古4255-17,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해사록(海槎錄)』(慶暹, 1607년, 『국역해행총재』 2권, 민족문화추진회, 1974.)
  • 다시로 가즈이 지음, 정성일 옮김, 『왜관』, 논형,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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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흥숙, 「17세기 두모포왜관의 경관과 변화」, 『지역과 역사』 제15호, 부경역사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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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다 쇼고[小田省吾] 稿, 「釜山及其附近に於ける倭館變遷と遺址」, 『釜山日報』, 1925(다이쇼 14년) 11월 3~9일/10~16호, 나머지 결호), 부산광역시 시민도서관 MF(구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복제 필름).
  • 오다 쇼고[小田省吾], 「釜山に於ける和館變遷と遺址」, 『朝鮮史學』 第1~3號, 1926.
  • 오다 쇼고[小田省吾], 「李氏朝鮮時代に於ける倭館の變遷-就中絶影島倭館に就く-」, 『朝鮮支那文化の硏究』, 京城帝國大學 法文学会第二部論纂第一輯, 東京 刀江書院,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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