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성(佟養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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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의 여진인으로 명의 관직을 받았으나 이후에 건주여진으로 귀부한 인물.

개설

아버지를 따라 명에 향화(向化)하여 요동에 정착하였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건국하자, 그와 내통하였고 무순(撫順)을 함락하는 데 기여하였다. 누르하치가 종실의 여인을 아내로 주었으므로 어푸([額駙], efu) 칭호를 받았고 삼등 부장(三等副將)에 제수되었다. 1631년부터 귀순한 한인(漢人)에 대한 사무를 전적으로 관장하게 되었고 화기(火器) 주조를 감독한 공으로 암바 장긴([大將軍], amba janggin)이 되었다. 1632년 홍타이지가 차하르([察哈爾], cahar) 몽골을 공격할 때에 심양에 남아 수비하였는데, 이때 병으로 사망하였다. 시 울리 어푸([施吾理額駙], si uli efu)라고도 하였다.

가계

동양성은 만주 퉁기야씨(佟佳氏)이다. 아버지는 동양(佟讓)이며, 동양정(佟養正)의 친동생이었다. 동양성은 동보한(佟普漢)·동육십(佟六十) 등 2명 이상의 아들을 두었다. 동양성이 죽자 부장(副將)석정주(石廷柱)를 암바 장긴으로 임명하고, 그의 아들 동보한은 이등 암바 장긴으로 삼아 세습하게 하였다. 동보한이 죽자 그의 동생 동육십이 이었는데, 1639년에 한군기(漢軍旗)를 제정하면서 한군(漢軍) 정람기(正藍旗)에 예속되었다. 이후 동육십이 죽자, 그 아들 동국요(佟國瑤)가 계승하였다. 동국요는 1670년 한군 정람기의 부도통(副都統)이 되었고, 3년 뒤에 오삼계(吳三桂)의 반란이 일어나자 제독(提督)의 직함을 가지고 이를 진압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동양성은 여진인으로 명에 향화하였던 요동인이었다. 1619년 누르하치가 심하 전투(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형인 동양정과 함께 후금으로 귀부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8월 9일). 동양성은 1621년 8월, 정충신(鄭忠信)이 후금에 사절로 파견되었을 때 누르하치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정충신은 이때 후금에 대적한 한인 관원들의 행적을 열거한 편지를 조선에 보냈는데, 이에 따르면 후금군이 요양(遼陽)을 함락할 때 안찰사(按察使)장창국(張昌國)이 동양성과 이영방(李永芳)의 예를 들면서 회유하고자 하였는데, 장창국은 그들을 개와 돼지에 비유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동양성은 명의 입장에서는 역신(逆臣)이었지만, 후금에는 큰 도움을 주었다. 동양성 등 명에서 투항한 인물들을 향도로서 또 인근 요새를 회유하는 데에 힘을 썼다. 1631년 동양성은 귀순한 한인 가운데 건장한 자들을 뽑아 편성한 ‘우전 초오하[烏眞超哈], ujen cooha)’에 소속되어 귀순 한인에 대한 업무를 전관하기도 하였다. 이해에 동양성은 40문의 홍의포(紅依炮)를 비롯하여 다양한 화기 주조를 감독하였는데, 이것은 후금군이 처음으로 화기를 보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양성은 이해 8월에는 명의 대릉하성(大凌河城)에서 벌어진 전역에 참가하여 자신의 화기군을 거느리고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632년 1월, 홍타이지는 성 북쪽의 연무장에 행행하여 동양성의 우전 초오하를 열병하였는데, 정제되고 군율이 엄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해 4월 홍타이지는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차하르 몽골을 공격하러 가면서 동양성과 버일러 아바타이([阿巴泰], abatai), 두두([杜度], dudu) 및 대신 양구리([揚古利], yangguri), 일덩([伊爾登], ildeng)으로 하여금 심양에 남아서 지키게 하였다. 동양성은 홍타이지가 돌아오기 전인 이해 7월에 심양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상훈 및 추모

동양성은 순치 연간에 근혜(勤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