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東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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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후기 순조 때 이종휘(李種徽)의 문집인 『수산집(修山集)』 안에 수록되어 있는 역사서이다.

개설

『동사(東史)』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종휘가 지은 역사서다. 지은이의 당색은 소론파에 속하며, 백부 이정걸(李廷傑)이 윤증(尹拯)의 문하인 관계로 그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저자는 소론파 중에서도 양명학자 정제두(鄭齊斗)의 손서(孫壻) 신대우(申大羽)와 가까웠고, 홍양호(洪良浩)· 조중진(趙重鎭) 등과도 교유가 있어, 이들 3인의 서(序)와 발을 받아, 1803년(순조 3년)에 『수산집』을 간행하였다.

『동사』는 기전체의 형식에 따라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연표(年表)·지(志)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대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단군이 차지하는 혈통 및 문화적 위치를 격상시켜, 부여·고구려·백제·예맥·옥저·비류 등을 모두 단군의 후예로 간주하고, 발해도 고구려의 후예로 인정했으며, 이들이 만주에 세운 나라들이 본래 우리의 강토임을 분명히 해두려고 했다. 한국사를 중국 주변의 조그만 제후 국가의 역사가 아니라, 강역·문화는 물론 기후와 풍토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대등한 천하를 포용하는 역사로 여겨, 대국화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편찬/발간 경위

『동사』는 이중휘의 문집인 『수산집』에 들어 있다. 한국사의 서술에서 최초로 본기·세가·열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전체의 형식을 완전히 갖추어 고대부터 고려까지 서술하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조선의 유학자들이 대개 가치평가를 앞세우는 강목법(綱目法)을 따르던 것에 대비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자기 시대에 있었으나, 그것을 과거의 역사를 통해 규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것은 당시 천하에서 유일하게 중화의 문화를 간직한 조선을 역사적 맥락에서 설명하고, 지리적으로도 조선이 중화국가를 내세우는 데 충분하게 다양한 기후와 풍토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었다.

단군조선은 조선의 국가적 기원과 문화가 중국과 대등하게 출발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기자조선은 중화문화를 계승한 독립국으로서, 삼한은 위만조선보다 앞서 이루어져, 고조선과 고구려를 연결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고구려는 조선의 옛 땅에서 일어나 유교적인 예악과 문물이 뛰어났고 광활한 강토에 다양한 풍토와 기후를 가졌으며,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부여·옥저 등 한국 고대사의 여러 나라들의 위치를 격상시키고 한사군은 역사체계에서 삭제하였다.

위와 같은 인식은 근대의 대종교(大倧敎)의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고, 신채호(申采浩)는 이종휘를 조선 후기 역사가 중 가장 주체적인 인물로 평가하였다.

서지 사항

14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활자본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엽광곽(半葉匡郭)은 21.5×13.7cm이다. 10행 20자, 상백어미(上白魚尾)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31.5×19.5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동사』는 기전체 형식에 따라 본기·세가·열전·연표·표·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조선과 삼한, 그리고 부여·고구려 계통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것이 특징이다.

저자가 고대사에 주로 관심을 둔 것은 우리 고대의 문화와 영토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즉 청나라가 중원의 지배자가 된 이후 중국에는 이미 중화(中華)의 전통이 끊어졌고, 오직 우리나라만이 중화의 문화를 간직한 선진국가라는 인식하에, 이미 단군·기자 때부터 중국의 삼대(三代)와 같은 문화가 형성되어, 고구려·발해로 이어져 온 것으로 재구성하였다.

이종휘는 이 책에서 부여·고구려·백제·예맥·옥저·비류 등을 모두 단군의 후예인 것으로 간주하고, 발해 또한 고구려의 후계자로 인정함으로써 이들이 만주에 세웠던 나라들이 본래 우리의 강토였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하였다. 또한 고려 때 윤관(尹瓘)이 개척한 9성(九城)도 그 최북단인 선춘령(先春嶺)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요수(遼水)를 우리나라의 8대 강 중에 포함시킴으로써 요하 동서지방도 우리 강역 안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만주를 잃은 고려 이후의 강토도 3,000리가 아니라 제주도까지 포함하면 지방(地方) 6,000리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강토 속에 우리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기후와 풍토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리적 측면에서도 중화국가로 자부하는 데 손색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가 구성한 한국사는 중국 주변의 조그만 제후국가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과 마찬가지로 천하를 포용하는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단군·기자·위만조선을 3조선이라 하여, 3황(三皇)에 대비되는 당당한 국가로 인정하며, 이를 본기에 넣고, 부여·옥저·비류·예맥·삼한 등도 고조선에 신속(臣屬)한 나라로 보아, 고조선의 역사적 위치를 격상시켰다. 특히 삼한을 단군·기자조선에 신속한 나라로서, 생민(生民)의 초기부터 있었다고 한 것은 삼한을 중국의 유망민 집단으로 해석하고, 기준(箕準) 이후부터 마한이 성립하였다고 보는 통설과는 다른 것이다. 다만 위만에게 쫓겨난 기준이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왕이 되었다는 것은 긍정했으며, 마한이 삼한의 맹주로서 54국을 거느리는 대국이었다는 점에서 삼한을 삼한본기로 서술하고, 이를 후조선본기(위만조선) 앞에 배치하였다. 이는 위만조선의 성립보다도 삼한의 성립이 앞선 것으로 본 까닭이다.

한사군의 문제는 역사체계에서 삭제하였다. 이는 한사군이 낙랑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좌(遼左)에 있었을 뿐 아니라, 부여·예·맥·옥저·비류·낙랑국 등 여섯 개의 큰 나라들이 병립해 있었고, 한반도 남쪽에는 삼한의 78국이 엄존하여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단절로 해석되지 않았다.

저자는 고대국가의 강역에 관한 위치비정에 있어 대체로 선배 소론학자인 임상덕(林象德)의 설을 따랐다. 특히 삼한의 위치를 황해도 이남으로 본 것이나, 그 밖에 비류·대방·패수·환도·졸본 등의 위치 고증은 임상덕의 설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저자의 역사인식은 유학자의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사체(史體)인 강목법과 정통론(正統論)을 따르지 않았으며, 또 유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미신으로 간주되던 귀신 숭배의 전통을 신사지(神事志)라는 독립된 항목을 두어 정리한 것이 특이하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한국사를 중국 주변의 조그만 제후 국가의 역사가 아니라, 강역·문화는 물론 기후와 풍토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대등한 천하를 포용하는 역사로 여겨, 대국화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이수남, 「동사(東史) 김득용」, 『향토문학연구』 창간호, 향토문학연구회, 1998.
  • 임병용, 「조선 후기 역사서에 나타난 고조선 인식-李種徽의 『東史』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 정재훈, 「조선후기 사서(史書)에 나타난 중화주의와 민족주의」, 『한국실학연구』 8권, 한국실학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