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복현(同福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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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동복현 |
한글표제 | 동복현 |
한자표제 | 同福縣 |
상위어 | 전라도(全羅道) |
동의어 | 두부지(豆夫只), 구성(龜城), 옹성(甕城), 복천(福川), 나복(蘿蔔)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정성일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동복현(同福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6년 10월 10일, 『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고종실록』 10년 8월 5일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018년(고려 현종 9)부터 1143년(고려 인종 21) 사이에 보성군 관할이던 동복현이 승려 조염(祖琰)의 고향이라 하여 감무로 승격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4년(태조 3)에 동복감무가 화순감무를 겸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동복을 화순현에 합치고 화순감무라 불렀다. 1407년(태종 7)에 이름을 복순현으로 고쳤다. 1416년(태종 16)에 동복현과 화순현을 각각 복구해서 현감(縣監)을 두었다. 1455년(세조 1)에 화순현이 전라도 남원도(南原道)의 우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동복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광주진에 속했다. 1655년(효종 6)에는 화재로 전패(殿牌)를 태운 일로 동복현이 폐지되고 화순현에 편입되었다. 1664년(현종 5)에 동복현이 다시 설치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동복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동복현이 보성군에 소속되었는데, 승려 조염의 고향이라 하여 감무로 승격시켰다고 되어 있다. 그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1018년부터 1143년 사이로 추정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394년에 동복감무가 화순감무를 겸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405년에 동복을 없애고 화순현에 합쳐 소속시키고 화순감무라고 일컬었다. 1407년에 두 고을의 뒷 글자를 한 자씩 따서 이름을 복순현(福順縣)으로 고쳤다. 1416년(태종 16)에 동복현과 화순현을 각각 복구해서 현감을 두었다(『태종실록』 16년 10월 10일).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복현에 종6품 현감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동복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속대전』에서는 종5품 도사(都事) 1인을 삭감하고 종6품 교수(敎授) 1인을 둔다고 규정하였다.
변천
『대동지지』에 따르면 1655년에 화재로 전패를 태웠다고 하여 동복현을 폐지하고 화순현에 편입시켰다. 그 뒤 1664년에 다시 동복현이 설치되었다. 『여지도서』에는 그 시기가 1663년(현종 4)으로 되어 있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동복을 전라도 남원도의 우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동복이 전라도 광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동복이 속한 광주진은 충좌위의 우부(右部)인 나주진관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5개 거진을 중심으로 그 아래 여러 진에 편제된 내륙과 연해 지역의 육군과 수군이 전라도의 방위를 맡았다.
조선후기에는 순천거진이 전라전영(全羅前營)으로 바뀌었다. 전라전영의 속읍은 순천·장흥·진도·낙안·보성·강진·흥양·동복·광양·해남 10곳이며,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188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95명으로 되어 있다.
1873년(고종 10)에는 삼군부(三軍府)가 동복현에 포군(砲軍) 20명을 설치하였다(『고종실록』 10년 8월 5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동복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동복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1914년에는 그것이 화순군으로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 『화순군사』, 화순군사편찬위원회,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