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관광단(東京觀光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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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지배층과 관민에게 한일병합을 촉진하고 일본의 발전상을 선전하기 위해 조직한 일시적인 관광단체.

개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한 이후 통감부에서 한국 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여 한일 양국의 합병을 추진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조직한 관광단체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한국과 만주, 중국을 자신들의 활동 및 생활 영역으로 파악하여 이 지역에 진출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정치·군사적 침략만이 아니라 동경과 오사카의 신문사들이 경쟁적으로 만한순유단(滿韓巡遊團)이라는 관광단을 조직하여 일본 국민들의 대륙 진출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일본인들은 자국의 한국 침략과 대륙 진출을 시대의 당연한 조류로 인식하고 적극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통감부는 이런 관광단이 자국에서 효과를 발휘하자 한국에도 동일한 정책을 펼쳤다. 먼저 대한제국 지배층인 왕실과 양반들을 중심으로 관광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주요 관광지와 교육, 산업지대를 다녀오게 했다. 이후 관료층과 일반인, 지방민에 걸쳐 자발적으로 관광단을 조직해 도일하도록 했다. 특히 이들의 일본 내 주요 관광지가 동경이었으므로 대부분 동경관광단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당시 관광단의 일원 중에서 일본에 유학하거나 체류한 경험이 있는 자의 경우 대부분 친일적 경향을 보였다. 물론 귀족관광단으로 일본에 다녀왔던 이중하(李重夏)나 일부의 사람들은 도리어 반일적인 인식을 견지했으나, 이렇게 관광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사람들은 이후 대부분 친일적 성향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관광은 대한제국인의 안목을 넓혀주는 일반적인 관광이 아니었다. 일본이 근대 서구 문명을 도입한 후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양상을 목격하게 하여 자발적으로 한국의 일본 식민지화에 동조하는 것은 물론 미화시키게 하려는 획책이 기저에 숨어 있었다. 결국 이 관광단은 관광인이 주체가 되어 개인의 인문교양을 함양하고 휴식을 취하는 일반적인 관광 코스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기획한 것에 따라 움직였다.

조직 및 역할

관광단은 남녀가 혼성된 경우, 행정구역별 조직, 사회계층별 구성 등 다양한 조직 형태를 보였다. 관광단에는 신문기자와 일본인 통역이 동행했으며, 일본 내에서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하에 관광단의 접대와 환영을 성대하게 진행했다. 관광단원은 귀국한 이후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일본의 발전상과 우월성을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선전하고 광고하였다.

예컨대, 통감부 시기인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경성일보사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인을 대상으로 일본관광단 행사를 실시하였다. 당시 『경성일보』는 통감부 기관지로서, 사장 임명을 비롯해 인사와 경영 전반에 걸쳐 통감부의 직접 관할하에 있었다. 따라서 경성일보사의 일본관광단 행사는 통감부와의 협의하에 추진되었다. 1차 일본관광단은 한국인 94명, 경성일보사 직원과 통역 등 임원 16명을 합해 총 11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대부분은 대한제국의 전·현직 관료, 실업가, 유생, 신문기자 등이었다. 일본관광단은 1909년 4월 11일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시모노세키·히로시마·오사카·나라·교토·도쿄 등을 거쳐 5월 10일 귀국하였다. 이 관광단 행사에서 주최 측이 보여준 것은 제철소·군수공장·방적공장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문명과 고도(古都) 교토와 나라의 사적들로 대표되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였다. 관광 중에 일본 군복을 입고 군사체조를 하고 일본 군가를 부르는 영친왕을 만나기도 했다. 일본의 정치적 의도 속에 진행된 이 행사에서 관광단원들은 일본의 근대문물에 압도당하고 한국의 초라한 현실을 한탄하였다.

관광단원은 한국에 돌아온 후 7월부터 9월까지 자신들이 일본에서 견문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유세를 하였다. 그들이 행한 유세의 주된 내용은 첫째, 일본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통해 그들의 한국인에 대한 친절한 마음을 확인했다는 것, 둘째 영친왕이 일본에서 우대를 받고 있다는 것, 셋째 일본의 상공업이 크게 발달한 상황, 넷째 일본은 문명국이며, 따라서 한국은 일본의 문명을 배워 국력을 키우기 위해 일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변천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에는 수시로 내지시찰단, 내지관광단이 조직되어 지속적으로 이 단체들은 일본을 관광하여 일본제국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단체로 변모했다. 특히 1910년 10월, 일제에 의해 작위를 받은 76명의 조선귀족 중에서 일부가 부부동반으로 일본동경을 비롯한 대도시에 관광을 갔는데 이들을 조선귀족관광단 또는 귀족 동경관광단이라고 하였다(『순종실록부록』 3년 10월 22일). 이들의 체류비용은 총독부에서 전액 부담하였고 10월 23일 일본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관광 이후 시종 일본의 발전 상황을 선전하였고 한일 간 화합을 강조하는 친일적 행태를 보였으며, 일제강점 초기 일본관광에 참여한 이들도 동일한 양태를 보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 『주한일본공사관일기(駐韓日本公使館日記)』
  • 『매일신보(每日新報)』
  • 박양신, 「일본의 한국병합을 즈음한 ‘일본관광단’과 그 성격」, 『東洋學』3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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