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통(都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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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팔기제(八旗制)의 근간을 이루는 기(旗, [gūsa])의 지휘관 명칭.

개설

도통(都統)은 만주어로 두퉁(dutung)이라고 발음된다. 만주, 몽고, 한인 팔기에서 각 기를 영솔하는 지휘관이다. 이는 구사어전[固山額眞, gūsai ejen, gūsa ejen]과 동일한 의미이다. 건주여진의 흥기, 후금 단계에서 각 구사는 누르하치와 슈르가치의 아들, 조카 등이 나누어서 직접 지휘하였으나, 이들은 대부분 호쇼, 도로 버일러 혹은 군왕(郡王), 친왕(親王)의 봉작을 받고 기주(旗主)가 되고 그 아래에 도통을 두어 군사 지휘를 담당하게 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팔기제로 잘 알려진 후금 즉, 청의 군제는 평시의 생활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닌 공동체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각 기 즉, 구사는 깃발과 테두리에 두른 색의 차이로 구분했다. 가장 상위의 구사([固山], gūsa)에서부터 아래의 니루([牛彔], niru)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인 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지휘관은 곧 이전의 추장 혹은 세력가들로 구성되었다. 도통이라는 관제는 만주식 제도를 한식 제도로 고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체계화된 계통을 수립함으로써 만주족은 몽고, 한인 등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조직을 통제할 수 있었다.

조직 및 역할

도통은 만주, 몽고, 한인 팔기(八旗)에 모두 있었다. 하나의 기에는 5개의 잘란잘란([甲喇], jalan), 하나의 잘란에는 5개의 니루가 있었고 하나의 니루는 약 300여 명의 군사로 구성되었다고 하는데, 경우에 따라 규모나 편제의 차이는 있었다. 도통 아래에는 좌와 우 2명의 부도통(副都統, [meiren i ejen, meiren i janggin])이 있었다. 도통은 군사 작전의 지휘는 물론 평시 기의 관리까지 담당했다.

도통은 주요 군사 지점에 주둔하는 군사 사령관이기도 했지만, 행정을 전담하는 별도의 관원 즉, 장군이 없는 경우에는 행정의 장관으로도 기능했다.

변천

후금 즉, 청은 본래 구사어전이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1660년에 이르러 한어 명칭으로 도통이라는 이름을 제정했다. 1723년에는 구사어전을 ‘구사를 총관하는 관원’이라는 의미의 ‘gūsa be kadalara amban, 혹은 gūsa be kadalara janggin’이라고 개칭했고 도통이라는 한식 명칭은 계속해서 사용했다. 후금 시기와 청초에는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아들과 조카들이 직접 관장했으나, 몽고와 한인을 포함시키고 규모가 확장되면서 별도의 관직이 되었다.

1699년 청의 도통이 함경도 지역으로 왔을 때 지역의 통인, 사령 등이 노정기(路程記)를 써주고 산성의 위치 등 군사 기밀을 알려주었다는 이유로 효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숙종실록』 25년 4월 20일). 이는 조선이 여전히 청에게 군사적인 기밀을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776년에는 조선의 진주사김치인(金致仁) 등이 관향은(管餉銀) 1천 냥을 분실하여 이 사태를 청의 예부(禮部)와 금주부(錦州府)의 도통에게 보고하였는데, 이때 건륭제는 은을 대조하여 찾아주어 대국의 체통을 유지할 것을 지시했다(『정조실록』 즉위년 9월 1일). 이 사건의 처리에서 금주의 도통은 심양의 장군과 함께 중재하여 처리했음이 주목된다.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만문노당(滿文老檔)』
  • 杉山淸彦, 『大淸帝國の形成よ八旗制』, 名古屋大學出版會,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