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통소인(都統所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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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년(성종 11) 영안도관찰사이극돈이 왕실에 바친 고려시대의 관인.

개설

조선에서는 고려시대의 관인(官印)을 수습(收拾)하여 왕실에 바치고 이를 상고(詳考)한 기록이 여럿 보인다. 그중 하나인 도통소인은 고려 도통사(都統使)의 관인이다.

연원 및 변천

1480년(성종 11)에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이극돈(李克墩)이 고인(古印) 1개를 얻어 바쳤는데, 그 인배(印背)에 숭경(崇慶) 2년 3월 ○일 예부(禮部)에서 제조하였다고 하였다. 숭경은 금(金)나라의 연호이다. 그 인문은 ‘도통소인(都統所印)’이었다.”(『성종실록』 11년 6월 18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도통소인에 대해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관직명으로 도통사가 있다. “공민왕 18년에 각 도에 도총도통사(都摠都統使)를 두고 진무(鎭撫) 2명을 두되 하나는 종2품으로, 하나는 정3품으로 하였다.”라는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 관직임이 확인된다. 인배의 ‘숭경 2년(1213) 3월 ○일 예부에서 제조함.’이라는 관지(款識)는 관인의 담당기관에 대한 언급으로 주목된다. 예부는 주로 예의, 제향, 조회, 교빙, 과거에 관한 업무를 맡았다.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예의사로 명명하였고, 이후 예부 등으로 개칭하였다. 이속(吏屬)은 주사(主事) 2명, 영사(令史) 4명, 서령사(書令史) 2명, 기관(記官) 6명, 전서사자(篆書書者) 2명을 두었다. 전서서자 2명이 관인의 제작에 참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관인은 예조의 계제사(稽制司)에서 관장하였으므로 예조에서 인장을 신조(新造)·개조(改造)하는 제도는 고려로부터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고려의 관인을 수습하고 고증한 기록들은 고려의 관인 유물이 빈약한 오늘날 고려 관인에 대한 이른 시기의 실사기록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조선사찰사료』 등에서 찾을 수 있다. 1485년(성종 16)에는 영안도 온성에서 인장 하나를 얻어 진상하였는데, 한 면에 ‘천태사년월일(天泰四年月日)’이라 기록되어 있어 홍문관으로 하여금 연호를 상고하게 한 기록이 보인다(『성종실록』 16년 11월 13일).

인장의 제작 시기인 ‘천태 4년’은 1219년(고려 고종 6)이다. 천태 연간 동하(東夏)의 관인은 현재 중국 길림성박물관이 소장중인 부통소인(副統所印) 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숭경 연간의 관인과 마찬가지로 동제주조(銅製鑄造)로 제작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성인근, 『한국인장사』, 다운샘,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