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무(삼군진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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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대 설치되었던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의 장관으로 세조대 도총관(都摠管)으로 개칭됨.

개설

1409년(태종 9) 삼군진무소가 의흥부(義興府)로 개칭되면서 도진무의 직명이 판사(判事)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1412년에 의흥부가 혁파되었다가 1414년을 전후하여 삼군진무소로 복설되면서 도진무의 직명도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모두 3명을 두어 각각 일군(一軍)을 전담하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혼자서 일군을 담당하기 어렵다는 의견에 따라 모두 6명을 배치하기도 했다. 간혹 문신을 도진무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무신이 겸임했다.

담당 직무

삼군진무소가 기능하던 태종대에는 병조와 군령 체계상 같은 지위에 있었다. 따라서 왕으로부터 중요한 군령이 내려지면 병조당상관과 도진무가 함께 나아가 왕명을 받았다. 아울러 군령의 작은 일은 병조의 낭청과 진무가 함께 승정원으로 나아가서 명령을 받는 등 두 관사에서 반드시 함께 명령을 받은 후에 군령을 시행했다.

삼군(三軍)에 1명씩을 두어 각기 일군에 관련된 군무를 전담하도록 했는데, 혼자서 모두 감당하기에는 군무가 벅차다고 하여 사정에 따라 6인을 두기도 했다. 세종대 이후 역할이 크게 강화되어 군사상 중요한 의논에 병조와 함께 반드시 참여했다. 무과(武科), 병법(兵法), 진법(陣法), 훈련 및 군정 등 모든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세조대 도총관으로 개칭되면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수장 역할을 담당했다. 오위도총부가 오위에 대한 지휘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도총관은 오위에 대한 명령 통솔권자 역할을 맡았다. 당시 도총관은 부총관과 합쳐 10명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겸직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의정부의 고위 관료나 종친·부마 등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금군(禁軍)을 관장하고 입직(入直)하는 일을 담당했다.

변천

1409년 설치되었던 삼군진무소의 책임자로 나타난 직제이다. 1412년 의흥부가 혁파되었다가 1414년을 전후하여 삼군진무소로 복설되면서 도진무의 직명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1466년 도총관으로 개칭되었고, 성종대에는 도진무가 군병을 관장하는 권한이 막중하다 하여 임기를 1년으로 제한했다.

참고문헌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韓國硏究院, 1983.
  • 오종록, 「조선초기 兵馬節度使制의 成立과 運用」(상) 『진단학보』 59, 진단학회, 1985.
  • 오종록, 「고려말의 都巡問使」『진단학보』 62, 진단학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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