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지계(渡遼之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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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 전황이 급박한 상황에서 선조가 요동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주장.

개설

도요지계(渡遼之計)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조선의 국경을 넘어 명의 영토인 요동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선조의 요동 귀부 시도’ 또는 ‘내부론(內附論)’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도요지계의 주장은 조선이 일본군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다는 판단하에 제기된 것이다. 이는 조선이 명에 원병을 요청한 일과 광해군의 분조활동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다.

역사적 배경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釜山鎭), 그 이튿날 동래성(東萊城)을 함락했다. 뒤이어 일본군의 후속부대가 계속 조선에 상륙하였다. 일본군은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중로,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좌로, 흑전장정(黑田長政)이 우로 등 세 방향에서 한성으로 향했고, 수군은 남해안을 돌아 서쪽으로의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이 부산 함락 소식을 접한 것은 1592년 4월 17일이었다. 조선 조정은 즉각 이일(李鎰)과 신립(申砬) 등을 파견하여 일본군의 북상을 막게 했다. 그런데 이일은 상주에서, 신립은 충주에서 모두 일본군에게 패했다. 신립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4월 30일 새벽 비가 오는 가운데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연이은 패배로 국왕이 피난을 가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조선 조정은 일본군을 막아낼 힘이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궁극적 목적은 명을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자신들의 요구를 조선이 거절했기 때문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명이 군사를 파견해서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내부에는 국왕의 안전을 보장할 곳이 없다는 생각에서 명에게 군사원조 요청과 함께 선조가 요동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발단

명에 군사원조를 요청해야 한다는 주장은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야 한다는 결정과 동시에 제기되었다(『선조수정실록』25년 4월 14일). 피난을 떠나기 하루 전인 1592년 4월 29일 이항복(李恒福)은 의주(義州)로 피난했다가 상황이 급박해지면 명으로 향하여 뒷날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령(掌令)권회(權恢)는 도성 사수를 주장했고, 신잡(申磼)·박동현(朴東賢)·해풍군(海豐君)이기(李耆) 등도 선조의 피난을 반대했다. 하지만 선조는 30일 새벽 도성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조선군이 임진강에서 패하기 전 이항복은 다시 한번 명에 원병을 요청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때 류성룡(柳成龍) 등이 반대하자 이항복은 중국 삼국시대 유비(劉備)가 손권(孫權)에게 의탁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승리를 거둔 예를 들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적벽대전 당시 유비는 오(吳)나라에 머물렀던 만큼 이때 역시 선조가 명으로 향하는 것이 논의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명이 조선의 청병요구를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과 함께 명의 출병에 따른 폐해와 부작용 등이 제기되면서 이항복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5월 7일 국왕의 행차가 평양에 이르자 이항복은 다시 명에 구원 요청과 선조의 요동으로의 피난을 주장했다. 이덕형 역시 같은 의견을 냈고, 결국 이덕형이 청원사(請援使)로 명에 파견되었다.

전세가 악화되어 6월 10일 평양을 떠나 북쪽으로 향하게 되면서 선조의 요동으로의 내부는 보다 구체화되었다. 선조는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고, 자신이 요동으로 가는 것은 피난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안남(安南: 현 베트남)이 멸망한 후 명의 도움으로 회복한 예를 들며 국가를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선조실록』25년 6월 13일). 23일 선조는 요동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도록 명했고, 류성룡과 윤근수(尹根壽) 등은 민심의 해이와 의병 및 관군의 붕괴, 명의 속국이 될 가능성 등을 들어 반대의 뜻을 표했다.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선조는 경성(鏡城)으로 향하려 했지만 이항복은 명에 원병을 요청한 만큼 의주로 향해 명군을 영접해야 하며, 만일 잘못될 경우 요동으로 옮겨 훗날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조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의주로 향했다.

경과

청원사이덕형이 명에 파견된 후 명은 조선에 원병 파견을 결정했다. 이어 요동도사는 사세가 위급할 경우에 한해 선조가 요동으로 향하는 것을 허락하였다(『선조실록』25년 6월 27일). 하지만 명은 선조가 요동에 들어올 경우 수행원의 수를 1백 명 이하로 정했고, 선조가 조선에서 영토를 지킬 것을 권하였다. 조선의 신하들 역시 선조가 요동으로 향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의 의견이 많았다. 결국 선조는 의주에서 사태를 관망키로 결정했고, 그 결과 선조의 요동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 『백사선생별집(白沙先生別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손종성, 「임진왜란시 대명외교(對明外交)-청병외교(請兵外交)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14,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이철성, 「이덕형의 임진왜란 중 외교활동」, 『한국인물사연구』7, 한국인물사연구회, 2007.
  • 정억기, 「백사 이항복의 외교 활동」, 『한국인물사연구』8, 한국인물사연구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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