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거원(都擧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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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5년(선조 38)∼1677년(숙종 3) = 73세.] 조선 중기 인조~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승문원 판교(判校)이다. 자(字)는 화숙(和叔)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출생지는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용안면(龍安面)이다. 아버지는 도경창(都景昌)이고, 어머니 함열남씨(咸悅南氏)는 남궁인(南宮戭)의 딸이다.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와 잠곡(潛谷) 김육(金堉)의 문인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39년(인조 17)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사마방목>]

1646년(인조 24) 식년(式年) 문과(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2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성균관 학록(學錄)에 보임되었다.

1647년(인조 25) 성균관 학정(學正)을 거쳐서, 1647년(인조 25)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다.

현종 시대 활동

1662년(현종 3) 만경현령(萬頃縣令)으로 재임할 때, 도경유가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한 내용을 암행어사>가 장계하면서 현종으로부터 표리일습(表裏一襲; 옷의 겉감과 안감 1벌)을 하사 받았다. 이후 외직으로 흥양군수(興陽郡守)와 순천군수(順天郡守)를 역임하였는데, 고을의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흥양과 만경에는 군민들이 세운 선정비(善政碑)가 있으며, 순천에도 군민들이 세운 동비(銅碑)가 있다. 내직으로 도총경력(都總經歷)⋅통례원 우통례(右通禮)⋅예빈시 정(正)⋅승문원 판교(判校)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77년(숙종 3) 죽었는데, 향년이 73세였다.

성품과 일화

1673년(현종 14) 예빈시 정으로 재임할 때, 명나라 남씨(藍氏)의 팔진(八陣)⋅변진(變陣)⋅호령(號令)⋅풍후(風后)⋅악기진(握奇陣)과, 척계광(戚繼光)의 뇌굉진(雷轟陣)⋅원문 노인(轅門老人)⋅팔문 구성(八門九星) 등의 도(圖)와, 도경유 자신이 지은 도해(圖解) 및 초창(草創)⋅거패(車牌) 등의 제도를 합하여 만든 진법(陣法)에 관한 책자를 현종에게 올린 정도로 병학(兵學)에 밝았다.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깊었으므로, 이러한 덕행을 기리기 위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농은유고(農隱遺稿)』
  • 『창계집(滄溪集)』
  • 『회곡집(晦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