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수충(德川秀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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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막부의 2대 장군.

개설

일본 강호막부의 2대 장군으로 1605년에서 1623년까지 재직하였다. 1605년 4월 16일 덕천가강으로부터 정이대장군의 칭호를 물려받아 강호막부의 2대 장군이 되었다.

가계

덕천가강(德川家康)의 3남이며, 법명은 대덕원전일품대상국공존의(台德院殿一品大相國公尊儀)이었다. 모는 가강의 측실인 보대원(寶台院)으로 1579년(선조 12) 4월 7일 원강국(遠江國) 빈송성(浜松城)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은 장송이며, 후에 죽천대로 바꾸었다. 1590년 정월에 경도에 가서 15일에 풍신수길을 배알하고, 그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받아 수충(秀忠)이라고 명명하였다. 1630년 외손녀 일궁(一宮)이 명정천황(明正天皇)이 되면서 천황의 외할아버지가 되었다.

활동 사항

1590년 소전원(小田原) 전투 즈음에 사실상 풍신수길의 인질로 경도에 상경하여 관례를 치른 뒤 직전신웅(織田信雄)의 딸이자 풍신수길의 양녀인 소희(小姫: 春昌院)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이후 풍신수길과 직전신웅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이혼하였다. 이후 중납언(中納言)에 서임되어 강호중납언(江戶中納言)으로 불리었으며 풍신수길로부터 우시(羽柴) 성씨가 주어졌다. 1595년에는 풍신수길의 또 다른 양녀이자 직전신장(織田信長)의 조카딸로 풍신수길의 애첩 정(淀)의 여동생 강(江)과 재혼하였다.

1590년 정월에 경도에 가서 15일에 수길을 배알하고, 그의 이름을 받아 수충(秀忠)이라고 명명하고 종사위하시종(從四位下侍從)에 서임되었다. 1591년 정4위하소장(正四位下少將)을 거쳐 참의겸우근위권중장(參議兼右近衛權中將), 1592년 9월 9일 종3위권중납언(從三位權中納言)에 올랐다.

1600년 관원(關が原) 전투에서 승리한 덕천가강은 1603년 2월 정이대장군 직위에 올라 강호막부를 열었다. 2년 뒤인 1605년 덕천수충은 1605년 2월 24일 수행하는 무리 100,000여 명을 이끌고 3월 21일 경도에 상경하였으며, 4월 7일 덕천가강으로부터 장군 직위를 물려받아 막부의 2대 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1606년 새롭게 조영된 강호성(江戶城)으로 옮겼다. 이듬해인 1607년(선조 40)에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여 새로운 장군이 된 수충을 접견하였다(『선조실록』 40년 9월 5일)(『선조실록』 40년 9월 5일)(『선조수정실록』 40년 8월 1일).

다만 이 시기는 준부성(駿府城)에 거주하는 덕천가강이 실권을 갖는 이른바 ‘대어소시대(大御所時代)’여서 수충은 주로 덕천 직할령 및 보대대명(譜代大名)들을 통솔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614년(광해군 6) 3월9일 종1위우대신(從一位右大臣)에 서임되고, 1614년과 1615년 2회에 걸친 대판성 공격에 장군이자 총대장으로 참가하여 풍신수뢰(豊臣秀賴)와 그의 생모 정을 자살에 이르도록 하고, 풍신 가문을 멸함으로써 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이 소식은 대마도를 통하여 조선에도 전해졌다(『광해군일기』 7년 윤8월 12일). 이후 일본은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였고 조선은 사절을 보내 수충을 접견하게 하였다(『광해군일기』 9년 1월 8일)(『광해군일기』 9년 5월 30일).

이후 수충은 정국 아전을 위한 법률을 추진하여 무가 출신의 대명들을 통제하는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 조정과 문관들을 통제하는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 등을 제정하였다.

1616년 4월 17일 가강이 사망하면서 정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주정충세(酒井忠世)·토정이승(土井利勝) 등 자신의 최측근 인사들을 노중(老中)에 임명하여 막부의 중추를 장악하였으며, 복도정칙(福島正則) 등 다수의 외양대명(外樣大名)들을 개역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이후 어삼가(御三家)를 구성하는 세 남동생에게 각각 미장(尾張)·기이(紀伊)·수호(水戶)를 영지로 내리고 차남 충장(忠長)에게는 준하(駿河)·원강(遠江)·갑비(甲斐)를 주었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가강의 만년의 정책을 이어받아 탄압하였고, 외교적으로는 쇄국정책을 추구하여 외국 국적의 선박이 기항할 수 있는 항구를 평호(平戶)·장기(長崎) 등으로 한정하였다.

1623년 장군의 지위를 아들 덕천가광에게 넘겨주고 대어소(大御所)로 물러났으나 이후 강호 1632년 1월 사망할 때까지 강호서 서쪽 성(西ノ丸)에서 정사를 살피며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하였다(『광해군일기』 14년 1월 22일).

묘소

동경(東京) 항구(港區)의 증상사(增上寺)에 있다.

참고문헌

  • 田中健夫·石井正敏 編, 『對外關係史辭典』, 吉川弘文館, 2008.
  • 三宅英利, 『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 1986.
  • 高木昭作, 「江戶幕府の成立』, 『日本歷史』 9, 岩波講座,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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