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종추숭(德宗追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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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이 1474년(성종 6)에 자신의 아버지였던 의경세자를 왕으로 추숭하고 종묘에 부묘하여 덕종으로 추존한 일.

개설

1469년(예종 1)에 예종(睿宗)이 붕어한 후 그의 조카로서 즉위한 성종(成宗)은 1471년(성종 2)에 자신의 아버지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왕으로 추존하여 의경왕(懿敬王)이라 하였고, 1474년(성종 5)에 중국 황제의 인가를 받아 다음 해 종묘에 부묘하고 묘호를 덕종(德宗)이라고 추존하였다.

역사적 배경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자로서 1455년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457년(세조 3) 20살로 요절하였다. 세조는 차자인 예종(睿宗)을 세자로 책봉하여, 1468년에 즉위하였으나 다음해 11월에 붕어했다. 모후였던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예종의 왕자인 인성대군(仁城大君)과 제안대군(齋安大君)이 어리다 하여 제쳐두고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차자였던 자을산군(者乙山君)을 후계자로 삼아 성종으로 즉위시켰다.

발단

종법(宗法)에 의하면 의경세자가 죽었을 때 다음 계승자는 그의 장자였던 월산대군(月山大君)으로 세워야 했으나 세조는 차자였던 예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또 예종이 죽었을 때는 그의 장자였던 인성대군(仁城大君)이 후계자가 되어야 했으나,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차자였던 성종을 후계자로 즉위시켰다. 성종은 종통상 예종의 후계자로 간주되어 그를 아버지로 불렀고 자신의 생부를 백고(伯考)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시에는 종법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함으로서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들게 된 것이다.

경과

1471년 1월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한치의(韓致義)가 중국의 환관이었던 김보(金輔)로부터 의경세자의 추존을 권유받고 돌아와 조정에 보고한 직후 그를 의경왕으로 추존하고 그 부인을 대비 소혜왕후(昭惠王后)로 높였다. 3년 후인 1474년 8월 신숙주·한명회 등이 추숭을 주장하여 중국에 주청한 결과 그 해 12월에 추숭이 허가되었다. 다음 해 4월에 정효종(鄭孝終) 등이 종묘 부묘를 발의하여 성종이 이를 성사시키고 묘호를 덕종(德宗)이라고 하였다.(『성종실록』 6년 10월 9일)

의의

덕종을 왕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하는 추숭은 종법에 어긋난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예학(禮學)의 수준이 낮고 종법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여 이 일이 별로 문제화되지 않았다. 또 이는 세조의 강압적 통치 직후에 있었고, 정희왕후와 한명회(韓明澮) 등 왕실과 훈구 세력에 의해 추진되었으므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세기 후 인조(仁祖)가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으로 추숭했을 때는 극렬한 반대와 논란이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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