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문(待賢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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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선화문과 협양문 사이 동쪽 행각에 위치한 협문.

내용

『궁궐지(宮闕誌)』에 대현문(待賢門)은 “협양문(協陽門)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1칸이며 남쪽으로 2칸의 행각이 있다. 북쪽으로 8칸 반의 행각이 있으며 행각에는 오정간(午正間)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대현문은 성정각(誠正閣)에 들어가기 위한 문으로 판단된다. 성정각의 남쪽에는 행각이 있는데, 이곳에 단칸의 영현문(迎賢門)이 위치하고, 영현문 바깥 서쪽 행각에 대현문이 위치하였다.

대현문 바깥쪽에는 다른 궁궐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공간이 있다. 남북으로 길게 마당이 놓였는데, 남과 북에 각각 출입하는 문이 만들어져 있다. 북문은 선화문(宣化門)이며 남문은 협양문이다. 선화문 북쪽에는 대조전(大造殿)이 위치하여 왕이 출궁할 때 선화문을 통해 외부로 나온다. 선화문 서쪽에는 대령차비처소(待令差備處所)가 위치하여 이곳에서 왕의 출궁을 준비한다. 왕은 이곳에서 여(輿)를 타고 협양문을 통해 출궁하거나, 혹은 대현문 인근에서 여를 바꿔 타고 출궁하였다.

1794년(정조 18) 정조는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몇 년 동안 유배되어 있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을 석방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반대한 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전교에 따라 대신들이 국왕의 허락 없이 합문(閤門)을 밀고 들어오자 정조는 대현문을 잠그고 액례(掖隷)들이 지키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8년 4월 10일)(『정조실록』 18년 4월 10일).

『승정원일기』 1794년(정조 18) 4월 14일자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협양문에서 신하들과 만났는데, 협양문은 대현문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를 타고 대현문을 나와 협양문에 이르러 여에서 내렸다.”고 한다.

『승정원일기』 1880년(고종 17) 5월에서 1881년(고종 18) 3월까지의 기록에 집중적으로 대현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대부분 “여를 타고 대현문을 출발했다.”거나 “대현문을 통해 환내(還內)했다.”는 내용이다. 왕이 창덕궁에서 출궁할 때는 대조전을 출발해서 대현문과 선화문, 협양문을 지나며, 동쪽으로는 건양문(建陽門)·동룡문(銅龍門)을 거치고, 서쪽으로는 숙장문(肅章門)·진선문(進善門)을 거치게 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誌)』「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1. 그림1_00017969_「동궐도형」, 대현문 부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 그림2_00017969_「동궐도」, 대현문 부분,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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