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합(大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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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섭정(攝政) 또는 관백(關白)직을 자식이나 동생에게 물려준 사람을 일컫는 칭호 및 관직명.

개설

대합(大閤)은 일본에서 태합(太閤), 태합하(太閤下)라고도 했는데, 좁은 의미로는 이전의 관백이라는 뜻이고, 넓은 의미로는 현직의 태정대신(太政大臣)과 좌대신(左大臣), 우대신(右大臣)으로 불린 삼공(三公)을 가리킨다.

처음 태합이 등장한 것은 평안시대(平安時代)였다. 등원도장(藤原道長)은 섭정직을 아들 등원뇌통(藤原頼通)에게 물려준 후 태정대신직도 사임하였다. 이후 등원도장은 태합으로 불렸다.

겸창시대(鎌倉時代) 이조량실(二條良實)과 이조량기(二條良基)가 관백직을 물려준 후 태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풍신수길 역시 조카인 풍신수차(豊臣秀次)에게 관백직을 물려준 후 태합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태합 또는 대합은 풍신수길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담당 직무

일본에서 관백은 문관의 우두머리였던 만큼 풍신수길로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때문에 태합의 직위에 오르면서 권력의 정점에 섰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각 지역 대명(大名)들의 권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때문에 실무 행정은 전전현이(前田玄以)·석산삼성(石山三成)·증전장성(增田長盛)·천야장정(淺野長政)·장속정가(長束正家) 등의 오봉행(五奉行)에게 지시하였을 뿐 권력의 완벽한 집중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변천

임진왜란의 주역인 풍신수길에 대해 조선에서는 관백, 대합, 태합 등으로 기록하였다. 1590년 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金誠一)은 풍신수길을 관백이라고 표현하였고, 『선조실록』에는 일본 침략 이후 풍신수길이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선조실록』 25년 6월 26일). 이후 1593년에 소서행장이 심유경(沈惟敬)에게 보낸 글에서 대합 전하(殿下)로 표현하였고(『선조실록』 26년 윤11월 4일), 1594년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명의 총병(總兵)유정(劉綎)에게 보낸 글에서는 풍신수길이 아들에게 관백직을 물려준 후 태합이 되었다고 설명하였다(『선조실록』 27년 4월 2일). 임진왜란 중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황신(黃愼) 역시 풍신수길이 아들에게 전위한 후 대합을 칭했다고 했으며, 피로인(被擄人)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다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풍신수길을 태합으로 기록하였다.

조선인들은 풍신수길이 관백직을 아들에게 전위한 후 대합 또는 태합이란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전위의 대상이 아들이 아닌 조카 풍신수차였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하였던 것 같다.

참고문헌

  •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 『학봉집(鶴峯集)』
  •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
  • 朝尾直弘 외 엮음, 이계황·서각수·연민수·임성모 옮김, 『새로 쓴 일본사』, 창작과 비평사, 2003.
  • 新村出編, 『広辞苑』, 岩波書店,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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