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언해(大學諺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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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학언해 |
한글표제 | 대학언해 |
한자표제 | 大學諺解 |
분야 | 철학/유교/국어 |
유형 | 문헌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성낙수 |
간행년일 | 1590년(선조 23) |
권책수 | 1권 |
사용활자 | 을해자체 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 |
소장처 | 도산서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학언해(大學諺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7년 10월 19일, 『선조수정실록』 18년 1월 1일, 『선조실록』 20년 12월 25일 |
선조(宣祖)대에 『대학(大學)』의 원문에 한글 토를 붙이고, 한글로 풀이 한 책.
개설
『대학언해(大學諺解)』는 선조의 명에 따라 중국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중용』의 원문에 한글 토를 붙이고, 한글로 풀이 한 책이다. 1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587년(선조 20)에 완성되었다. 간행은 1590년(선조 23) 교정청(校正廳)에서 담당하였다.]
중국에서 유교가 국교로 채택된 한대(漢代) 이후 오경(五經)은 기본 경전으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송(宋)대에 주희(朱熹)가 당시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 즉 성리학(性理學)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禮記)』에서 『중용(中庸)』과 『대학』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 중심의 체재를 확립하였다. 49편으로 구성된 『예기』 중 제42편이 『대학』에 해당하는데, 주희는 『대학』에 장구(章句)를 짓고 자세한 해설을 붙이는 한편, 착간(錯簡 : 책장 또는 편장의 순서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대학』의 내용은 삼강령 팔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령은 모든 이론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라는 뜻을 지니며, 명명덕(明明德)ㆍ신민(新民ㆍ親民)ㆍ지어지선(止於至善)이 이에 해당되고, 팔조목은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편찬/발간 경위
언해 사업이 본격화한 것은 선조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대에 유숭조(柳崇祖)·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은 경전(經典)에 토를 붙이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유희춘(柳希春)은 1574년(선조 7)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언해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고 먼저 『대학(大學)』, 『논어(論語)』의 주석서를 만들어 바쳤다.(『선조실록』 7년 10월 19일)
이러한 학문적 성과들을 바탕으로 선조는 1585년(선조 18)에 교정청을 설치하고, 경서에 구결을 달고 해석하는 방식이 유학자들마다 다름으로써 빚어지는 혼란을 바로잡으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대학언햌』는 『논어언해(論語諺解)』‚ 『맹자언해(孟子諺解)』‚ 『중용언해(中庸諺解)』‚ 『소학언해(小學諺解)』 등과 함께 간행되었다.(『선조수정실록』 18년 1월 1일) 그리고 이렇게 간행한 교정청본을 관본(官本)이라고 하여 개인본과 구별하였다. 이 사업에는 정구(鄭逑)·최영경(崔永慶)·한백겸(韓百謙)·정개청(鄭介淸)·정철(鄭澈) 등 당대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이듬해인 1586년(선조 19) 『소학(小學)』을 시작으로 1587년(선조 20)에는 사서삼경의 언해가 모두 끝이 났다.(『선조실록』 20년 12월 25일) 그리고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 중인 원간본에 ‘만력십팔년칠월일(萬曆十八年七月日)’ 내사기(內賜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1590년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대학언해』는 선조 때의 대표적 유신(儒臣)들 대부분이 참여하여 만든 경서언해의 결정(結晶)이다. 이에 비하여 이이(李珥)가 언해하여 1749년(영조 25)에 간행된 『대학율곡언해(大學栗谷諺解)』는 문체상의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일반 독자의 이해를 위해 순수 국어를 많이 쓴 데 비하여, 후자는 원뜻의 손상을 피하기 위해 한자어를 많이 썼다는 차이가 있다.
서지 사항
1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정청에서 간행하였다. 금속활자인 을해자체 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로 간행되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 초간본은 앞의 2장이 낙장(落張)인데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다른 경서 언해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언해』도 원간본이 간행된 16세기 후반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중앙과 지방에서 여러 차례 중간되어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해지고 있다. 규장각에는 모두 15종의 이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 이본들은 행자수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0행 19자본과 10행 17자본, 12행 23자본이 그것이다. 대체로 10행 19자본은 행자수에 있어서 원간본의 판식을 따랐으며, 10행 17자본은 1695년(숙종 21)에 나온 무신자본(戊申字本)의 판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12행 23자본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판식을 가진다.
구성/내용
이 책은 원문인 한문을 앞에 싣고 이어 언해를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원문과 언해문의 한자에는 한자음(漢字音)이 달려 있는데, 이 한자음은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한자음에 따르지 않고 현실한자음(現實漢字音)에 따라 표기하였다.
원간본에 보이는 국어학적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방점(傍點)도 달려 있고, ‘ㅿ’이 사용되었으나, 대부분 ‘ㅇ’으로 변화하였다. 예를 들면, ‘사이 ’, ‘이’, ‘을’, ‘애’, ‘그으기’와 같은 것들이다. ‘ㄷ’과 ‘ㅅ’은 어말 받침에서 ‘디’, ‘몯리로다’, ‘잇고’와 같이 구별되어 표기되었다. 또한 자음동화현상이 ‘민니라’, ‘인니라’, ‘몬니라’처럼 나타나고 있다. 어중의 된소리를 표기하기 위하여 ‘거시라’, ‘바애’, ‘삼읅거시’와 같은 표기가 쓰였다. 이처럼 방점과 ‘ㅿ’및 ‘ㆁ’을 보이는 최후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국어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1611년(광해군 3)에 간행된 책에는 방점은 표시하지 않고 있으나, 이 점을 제외하고는 원간본과 동일한 표기를 보인다. 한자음과 일부 어사에서 ‘而 靜 오직 仁 사이’에서처럼 ‘ㅿ’과 ‘ㆁ’이 쓰이고 있으며, 중철표기가 나타나고 자음동화가 표기에 반영되고 있다.
10행 19자의 목판본인 『대학언해』는 1631년(인조 9)에 간행됨 중간본임을 알 수 는데, 이 책은 탈획이 종종 보이며 인쇄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다. ‘ㆁ’은 쓰이지 않으며, ‘ㅿ’이 사용되고 있지만, 그 표기가 혼란스럽다. 중철표기나 자음동화 반영의 양상은 원간본과 동일하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자료에 대한 종합적 연구」, 『규장각』 3, 서울대학교, 1979.
- 이숭녕, 「대학언해의 율곡본과 관본과의 비교 연구」, 『동교 민태식 박사 고희기념 유교학 논총』, 1972.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