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판(大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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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기 지방 대판(大阪, [오사카])의 옛 표기.

개설

대판(大阪)은 일본 관서 지방(關西地方)의 한 지역으로, 서일본 최대의 도시였다. 대판시(大阪市)와 대판시를 부청(府廳) 소재지로 하는 대판부를 가리키는 지역 명칭으로, 넓은 의미로는 대판시를 중심으로 하는 경판신(京阪神, 대판도시권, 관서권)을 막연히 총칭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었다. 관서 지방의 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옛날에는 ‘大坂’으로 표기하였다.

명칭 유래

대판이라는 지명은 원래는 대화천(大和川)과 정천(淀川: 현 대천(大川)) 사이에 남북으로 놓여 있는 상정대지(上町台地)의 북쪽을 가리키며, 옛날에는 섭진국(攝津國) 동성군(東成郡)에 속하였다. 상정대지는 고대에는 ‘난파석(難波潟)’이라고 불리는 습지에 돌출된 반도 모양의 육지로, 낭속(浪速, [나미하야, 나니와]), 난파(難波, [나니와]), 낭화(浪花, [나니와]), 낭화(浪華, [나니와]) 등으로 표기되어 왔다.

대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96년 정토진종(淨土眞宗)을 일으킨 연여(蓮如)가 현재의 대판성 지역에 대판어방(大坂御坊, 西山本願寺)이라는 절을 세우고 주변에 그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는 데에서이다. 한자 표기는 당초에는 ‘大坂’이 일반적이었지만, ‘大坂’의 ‘坂’을 ‘언덕’ 자를 분리하면 “흙으로 뒤집히다”고 읽혀질 수 있으므로 강호시대 무렵부터 ‘大阪’이라고 표기되었고, 명치시대에는 ‘大阪’으로 정착되었다. ‘坂’에서 ‘阪’으로의 변경에 대해서는 명치 신정부가 ‘坂’이 “선비가 反하다”, 즉 “무사가 등을 돌리다”라고 읽을 수 있기 때문에 ‘坂’ 자를 싫어하였다는 설도 있고, 단순히 관리가 잘못 쓴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형성 및 변천

현재 대판시는 고대부터 뇌호내해(瀨戶內海)와 대판만(大阪灣)에 면하여 당시의 국제항이었던 주길진(住吉津)과 난파진(難波津) 등이 있던 외교에 관련된 항만도시로 번영하였으며, 난파궁(難波宮)·난파경(難波京) 등의 궁성과 도성이 조영되었다. 중세에는 정토진종의 본산이었던 석산본원사(石山本願寺)가 세워져 사찰도시로 발전하였으며, 1583년에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석산본원사 자리에 대판성을 쌓고 성하정(城下町)을 정비하였다. 이로써 사람과 물자가 모여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통신사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풍신수길을 만나기 위하여 머문 곳이 대판이었다(『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임진왜란 당시 심유경(沈惟敬)과 소서여안(小西如安)이 명 황제와 풍신수길을 속인 결과, 명과 일본 간의 강화가 합의되면서 명나라의 책봉사(冊封使)인 양방형(楊方亨)과 심유경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1595년 소서행장(小西行長)이 명 사신과 함께 조선의 사신 파견도 요청하였기 때문에의 접반사(接伴使)로 통신사황신(黃愼) 일행이 대판에 입성한 것은 1596년 9월이었다. 그러나 통신사 일행은 풍신수길을 만나지도 못하였고, 국서도 전달하지 못하였다. 명 사절만이 대판성에서 풍신수길을 만났을 뿐이었다(『선조실록』 29년 12월 7일)(『선조실록』 29년 12월 7일)(『선조실록』 29년 12월 21일).

1614년과 1615년 2차에 걸쳤던 대판 전투[大坂の陣]로 풍신씨가 멸망하면서 대판은 일시적으로 황폐해졌지만, 1619년 강호막부는 대판을 막부 직할지[天領]로 삼고 대판정봉행(大坂町奉行)을 파견하여 지배하도록 하였다. 대판성을 재건하는 한편 하천의 개수와 해자를 굴착하였으며, 각 번에서 장옥부(蔵屋敷)를 두었다. 또한 수로(水路)를 통하여 장옥부에 연공미(年貢米)가 옮겨졌기 때문에 808교(八百八橋)라고 불릴 정도로 다리와 수로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이리하여 강호시대의 오사카는 일본 전국의 물류가 집중되는 경제와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천하의 부엌’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하였다.

강호시대 중기에는 ‘大坂’과 ‘大阪’이 병용되었으며, 명치유신 이후 성립된 신정부는 1868년 원래 대판 삼향(三鄕)에 대판부(大阪府)를 두었다. 대판의 정식 표기가 ‘大坂’ 대신 ‘大阪’으로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듬해인 1869년에는 구획이 동·남·서·북으로 재편되었고, 1875년에 대·소구제도가 시행되면서 차례로 제1~4구가 되었다. 그리고 1879년에 군·구·읍·면 편제법이 시행되면 다시 동·남·서·북의 4구가 되었다. 1889년에는 시제(市制) 시행으로 대판 관내 대판시가 되었다. 대판시는 그 주변의 정촌(町村)을 합병하여 1925년에는 거의 현재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부는 주변의 현을 통합한 후 1887년에 내량현(奈良縣)을 분리하고 현재 대판부 영역이 되었다. 이로써 대판이라는 지명은 원래는 도시 이름이었으나 현재와 같은 광역를 가리키게 되었다.

현재 일본에서 동경에 이어 가장 큰 도시이다. 대판은 재일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로 시 동부의 생야구(生野區)는 전국적으로 재일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참고문헌

  • 塚田孝, 『近世大坂の都市社會』, 吉川弘文館, 2006.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89.
  • 김문자, 「이벤트로서의 조선통신사-풍신정권기 파견된 통신사를 중심으로-」, 『일본역사연구』 22, 일본사학회, 2005.
  • 방기철, 「추포(秋浦) 황신(黃愼)의 대일인식」, 『한국사상과 문화』 74,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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