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大院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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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원군 |
한글표제 | 대원군 |
한자표제 | 大院君 |
관련어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
분야 | 왕실/왕실구성원/종친·의친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대한제국 |
집필자 | 김병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원군(大院君) |
선왕(先王)의 직계 자손이 아니면서 왕위를 계승한 왕의 친아버지에게 준 작위.
개설
대원군(大院君)은 조선시대 왕위 계승에서 왕이 형제나 자손 등 후사(後嗣) 없이 죽어 종친 중에서 한 사람이 왕위를 계승한 경우, 새로운 왕의 친아버지에 대한 호칭이다. 조선에서 최초의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며, 그 전례에 의거하여 인조의 아버지와 철종의 아버지를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으로 추존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식이 왕위를 계승할 때 이미 죽었으며, 살아서 대원군에 추존된 자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대원군이라고 하면 흥선대원군을 지칭한다.
담당직무
조선시대에 왕이 형제나 자손 등 후사 없이 죽으면, 종친 중에서 골라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이런 경우 후손으로 선정된 왕의 친아버지는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조선시대 최초의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었다. 덕흥대원군 이후 인조의 아버지와 철종의 아버지를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으로 추존하였다. 조선시대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은 4명이었는데, 3명은 모두 자식이 왕위를 물려받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다만 흥선대원군만이 살아서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대원군이라고 하면 흥선대원군을 지칭한다.
조선시대 대원군으로는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이 있다.
덕흥대원군은 조선 최초의 대원군으로 이름은 초(岹)이고 자(字)는 경앙(景仰)이며, 아명(兒名)은 환수(歡壽)이다. 그는 중종과 창빈안씨 사이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나 1538년에 덕흥군에 봉해졌다. 1542년 판중추부사정세호의 딸과 혼인하여 하원군·하릉군·하성군 등 3남을 두고 30세가 되던 1559년에 병으로 죽었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고 그의 아들 하성군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는데, 그가 바로 선조이다. 선조는 북송(北宋) 영종이 친아버지 복왕(濮王)을 추존했던 고사(故事)를 따라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를 1569년(선조 2)에 덕흥대원군·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했다. 이로써 덕흥대원군은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 되었다.
정원대원군은 조선중기 추존된 왕으로 이름은 부(琈)이다.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능양군 즉 인조·능원대군·능창대군을 아들로 두었다. 1587년 정원군으로 봉해지고, 1604년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扈從)하였던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봉해졌다. 인조반정을 계기로 그의 첫째 아들이 새로운 왕이 되자 대원군에 추존되었다. 인조는 선조-정원대원군-인조로 이어지는 왕통을 세우기 위해 많은 논란을 거쳐 1627년(인조 5)에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를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존하였다. 명나라에서 공량(恭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계대원군은 조선후기의 왕족이며, 철종의 친아버지이다. 장조의 서자 은언군의 서자로 태어났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작위를 받지 못했다. 은언군은 상인들에게 많은 빚을 졌고 이를 영조가 알게 되면서 1771년(영조 47)에 직산에 유배되고, 다시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가 1774년에 풀려났다. 한편 전계대원군의 맏형인 상계군(常溪君)이담(李湛)은 1779년(정조 3)에 홍국영의 음모에 의해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786년에 자살하였다. 어머니 송씨와 형수인 상계군 이담의 부인 신씨는 1801년(순조 1)에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賜死)되면서 아버지도 사사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부모와 형, 형수의 죄로 연루되어 강화부 교동으로 쫓겨나 불우한 일생을 빈농으로 보내다가 1841년(헌종 7)에 향년 57세로 죽었다. 그의 장남 원경은 1844년에 중인(中人)민진용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 원범이 순조의 양자가 되어 철종이 되자 비로소 전계군이라는 작호가 내려졌다. 이후 축호와 사식을 송나라 복황과 수왕, 그리고 조선의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의 전례에 따라 다시 전계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이들 대원군은 모두 죽은 뒤에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추존되었고, 살아서 대원군에 봉해진 경우는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뿐이다. 그는 살아서 정치 활동을 한 유일한 대원군이며, 일반적으로 ‘대원군’이라고 하면 흥선대원군을 지칭한다.
흥선대원군이하응(李昰應)은 1820년에 영조의 현손(玄孫) 남연군(南延君)이구(李球)의 넷째 아들로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세손이어서 혈연적으로는 왕실과 멀지만 은신군(恩信君)이진(李禛)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종실(宗室)이 되었다. 그러므로 흥선대원군은 헌종과는 7촌, 철종과는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6촌 사이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대전회통(大典會通)』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김병우, 『대원군의 통치 정책』, 혜안, 2006.
- 김정숙,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예술 세계』, 일지사, 2004.
- 법제처, 『고법전 용어집』, 법제처, 1979.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 고전 용어 사전 1~5』,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 정책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성대경, 「대원군 정권 성격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5.
- 안외순, 「대원군 집정기 권력 구조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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